[최종문의 펀펀야구] 잊혀져 가는 대구 야구의 역사

입력 2008-10-31 08:32:06

대구시 북구에 위치한 칠성동 2가는 한때 야구 선수들의 산실로 주목할 만한 곳이다. 두산의 김경문 감독과 함께 정현발, 배대웅, 성낙수, 김근석, 최무영, 김성래, 강정길, 박태호 등 수많은 야구선수가 배출된 곳이 이곳이다. 아마도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야구장 2~3개를 합친 크기의 한 동네에서 A4 용지에 가득찰 정도의 야구 선수 명단이 나온 곳은 여기가 유일할 것이다.

칠성시장과 이웃해 인구가 많은 밀집형 주거지역에서 자란 탓도 있겠지만 가족이 많았던 당시에 형편이 넉넉지 않아 형제 중에 한명은 학교가 지원해주는 야구부에 가입할 것을 권유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부분이 야구를 시작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철둑길 근처의 공터 때문이었다. 부모들이 일하러 나간 뒤 또래의 친구들이 어울려 시간을 보낸 곳이 바로 동인동 가구골목 뒤쪽의 넓지막한 빈 공터였다.

열차로 석탄을 실어 나르던 하치장 근처의 공터는 이들의 천국이었다. 별다른 놀이가 없었던 시절 처음에는 주먹만한 고무공을 손으로 쳐내는, 야구와 비슷한 경기('야구사이'로 불리는 이 게임은 공을 몸에 맞추거나 송구된 공이 홈 구역으로 먼저 들어오면 아웃되었다)를 하며 놀았고 점차 자라면서는 시멘트 포대로 만든 글러브에 연식 야구공으로 하루에 몇 게임씩 정식 야구를 하며 석탄 가루에 온몸이 까맣게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들 중 재능 있는 어린이들은 10살이 넘으면 근처 옥산국민학교 야구부의 정식 부원이 되었다. 그러나 야구부에 들지 않은 학생들도 방과 후면 모여서 게임을 했고 모이는 곳이 한곳이다 보니 한 두살 어린 동생들도 자연 끼워주게 주면서 팀원은 줄지 않고 늘어갔다.

그리고 주말이면 야구부 친구들과 함께 이웃 동네의 또래들과 배트나 글러브를 걸고 원정경기를 벌이기도 했다. 근처 방천둑에도 비슷한 공터가 있어 경기는 언제나 성립되었다. 그렇게 해마다 공터에서 야구부로 편입되는 학생이 열명 가까이 되었으니 따지고 보면 이 전통이 오늘날 대구 야구의 밀알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도로가 넓어지고 건물이 높아지면서 공터가 서서히 없어지자 이러한 전통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있었던 일들이 기억 속에만 남아 점점 잊혀져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오늘날 야구가 올림픽 금메달의 위업을 달성, 한국의 위상을 세계에 높였지만 정작 대구 야구의 역사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1905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씨에 의해 이땅에 야구가 소개된 이후 눈부시게 발전해 왔지만 대구 야구의 뿌리는 이제 여든에 접어든 노년의 야구인으로부터 입으로만 전해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오래 전 대구 야구의 역사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대구 야구의 뿌리가 없었다면 오늘날 명문 삼성 라이온즈도 없었을 것이다.

비록 선수 시절 최고의 스타들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이들이 없었다면 이승엽도 없었을 것이다. 공터야 다시 만들면 되지만 기억이 사라지면 뿌리도 없이 허공만 남는다.

최종문 야구 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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