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종적을 감췄다. 비도 씨가 말랐다. 댐 깊이는 점점 얕아지고 저수지는 바닥이 보일 날도 멀지 않았다. 2008년 10월 대한민국. 논바닥이 쩍쩍 갈라지니 목마른 대지에 농심은 시커멓게 탄다. 전문가들은 벌써 내년 봄가뭄을 경고한다. 급기야 정부도 '범정부적 가뭄 장기화 대비'에 나섰다. 해마다 한여름 전국을 초토화하던 태풍은 어디 갔을까? 대한민국을 목마르게 하는 가을 가뭄에 숨겨진 의미는 무엇일까?
◆한반도 비켜간 18개의 태풍
올해 발생한 태풍은 모두 18개다. 이 중 한반도를 찾은 태풍은 단 하나. 7월 20일 군산 서쪽 약 170㎞ 부근 해상에서 소멸한 제7호 '갈매기'뿐이다. 지난 10년(1991~2000)간 한반도에 영향을 미친 태풍 평균수인 3.8개를 고려하면 매우 적다. 갈매기의 영향으로 지역에 따라 최고 300㎜ 가까운 비가 내리긴 했지만 그로 인한 피해도 예년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다. 내륙에 직접 상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해상황도 주로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발생했다.
전체 발생 건수도 준 편이다. 지난 10년간 발생한 태풍 수는 한 해 평균 26.2개. 지난 1998년 한 해 16개의 태풍이 발생해 주춤하긴 했지만 이 중 한반도에 영향을 미친 것은 2개로 올해와는 상황이 다르다. 태풍 발생 빈도가 잦은 7~9월 사이에도 지난 10년간 평균 3.5개가 한반도에 영향을 주었지만 올해는 '갈매기' 하나뿐이었다. 국가태풍센터에 따르면 올해 서태평양의 태풍 활동시간도 연간 100일 아래로 급감했다.
이렇게 한반도에 태풍이 급감한 데 대해 전문가들은 해수온도와 편서풍의 영향을 원인으로 꼽는다. 박종길 인제대 환경공학부 교수는 "우리나라 연안 해수온도가 낮아지면서 고기압이 발달해 태풍의 유입을 막은 것"이라고 했고, 오재호 부경대 환경대기학과 교수는 "대기 상층에 부는 편서풍의 영향으로 한반도·일본 지역에 북태평양 고기압이 강하게 형성된 점"을 들었다. 이로 인해 매년 한국을 찾던 태풍은 중국 본토 또는 대만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동인 부경대 환경대기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2000년 이후 태풍의 횟수는 급격히 줄어든 반면 한 번 오면 강도는 매우 센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태풍은 해수온도 25℃ 선을 따라 북상하는데 남해안 해수온도가 상당히 많이 상승했다"고 덧붙였다.
◆태풍 줄어 얻은 것, 잃은 것
태풍 피해가 줄면서 손익계산서도 달라지고 있다. 가을 수확기를 맞은 일부 작물은 태풍 피해가 없어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배나 사과 등의 과일, 그것도 상등급 과일의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여름 배추와 무도 생산량이 지난해 대비 10%가량 늘었다. 벼도 8월말 이후 물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데다 일조량까지 풍부해 대구·경북의 경우 쌀 생산량은 작년보다 2.4%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동해바다에선 양미리(까나리와 생김새가 비슷한 한류성 어종) 어획량이 30, 40% 급증했다. 그러나 이로 인한 풍년·풍어는 추석 이후 소비가 줄어든 시점에서 가격 폭락으로 이어져 농어민의 시름을 깊게 만들었다.
채소와 과일 거래가격은 폭락했다. 배는 15㎏ 상자당 공판장 경락가가 약 1만4천원으로 지난해(2만5천원)보다 45% 떨어졌다. 사과도 15㎏ 상자당 평균 2만9천원으로 거래돼 지난해 같은 시기(3만8천원)에 비해 24% 하락했다. 이달 초에는 한 달 새 50, 60%까지 폭락한 경우도 많다. 태풍이 농민을 웃긴 동시에 울린 셈이다.
태풍 발생 급감은 가을 가뭄에도 일조했다. 태풍이 몰고 오는 강한 비구름은 국내 저수량의 주요 공급원이다. 우리나라는 연 강수량의 절반 이상이 여름에 집중적으로 내린다. 그런데 태풍으로 인한 강수량이 급격히 줄어든데다 마른장마로 강수량 확보가 충분히 안 되면서 가뭄이 심해졌다. 기상청은 "지난여름 우리나라는 북태평양 고기압이 남부지방을 뒤덮어 비구름의 접근을 막았다"고 설명했다.
◆35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가뭄
마른장마에 태풍도 거의 오지 않아 전국 곳곳에서 '사상 최악의 가뭄'이라며 아우성을 친다. 지난달 대구 지역 강수량은 21.9㎜. 이는 평년 강수량(129.6㎜)의 16.9%에 불과하다. 22일 이전 10월에 내린 비는 겨우 0.5㎜로 평년(16.2㎜)의 3.1%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경북도 마찬가지다. 포항의 경우 9, 10월 상순 동안 59.8㎜로 평년 대비 33.5%에 그쳤다. 구미는 평년의 29.5%인 43.2㎜의 비만 내렸다.
5천500여 곳의 지역내 저수지는 저수율이 지난해 이맘때(90%대)보다 절반 가까이 줄어들어 식수난은 물론이고, 밭작물 피해까지 우려되고 있다. 안동댐과 임하댐, 영천댐 등 지역 주요 댐의 저수율은 평년의 60, 70%에 훨씬 못 미치는 30, 40%에 머물러 있다. 경북 영덕군 창수면의 주민들은 이미 식수난에 돌입해 물 전쟁을 치르고 있다. 경남 합천 가야산 계곡마저 바닥을 드러내자 해인사는 지난 14일부터 스님과 불자들의 공양을 위한 공양간 식수를 제외한 사찰 내 모든 음료대의 물을 끊는 비상조치를 단행했다.
가뭄은 이미 전국적으로 심각한 수준이다. 같은 기간 동안 밀양엔 11.7㎜, 산청 14㎜, 고흥 16.9㎜, 남원 19.8㎜가 내려 1973년 해당지역에 대한 기상관측 시작 이후 35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부산에도 22.4㎜만 내려 지난 1957년 이후 51년 만에 가장 적은 비가 온 것으로 관측됐다. '남부지방 사상 최악의 가뭄'은 이제 충청과 강원지역으로 확산됐다. 지난 한 달 동안의 강수량을 따지면 남부 지방은 사막, 중부 지방은 사바나처럼 건조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정부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비상급수가 실시되고 있는 곳도 경남·전남·충북 3개도 17개 시군에서 2만1천283가구, 5만569명에 달한다.
◆2015년 '한반도 대가뭄' 설도
전문가들은 가을가뭄이 내년 봄가뭄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장기간의 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가뭄이 닥칠 것이라는 연구가 있다. 변희룡 부경대 환경대기학과 교수는 지난 5월 30일 기상청 국립기상연구소에서 열린 가뭄전문가 워크숍에서 "한반도에서 6년, 12년, 38년, 124년 주기로 가뭄이 나타나는 증후를 포착했다"며 "2015년쯤 대가뭄이 시작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1777년부터 2006년까지 강우량을 조사한 변 교수 팀의 연구 결과를 보면 우선 6년 주기 가뭄은 1988년 충남, 1994년 전남, 2001년 경기, 2006년 전남·경남에서 발생했다. 12년 주기 가뭄은 1982년과 1994년에 생겼는데 여름철 장마가 짧거나 아예 생기지 않았다. 38년과 124년 주기 가뭄은 지속기간이 길고 피해 규모가 전국적으로 광대하다. 38년 주기 가뭄(대가뭄)은 3~10년, 124년 주기 가뭄(극대가뭄)은 25~29년간 지속됐다. 1884년 시작된 대가뭄의 정점인 1901년엔 두 장(長)주기 가뭄이 겹치면서 전국적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1901년 대가뭄은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그해 한해 동안 서울에 내린 비는 1척8촌5분, 즉 약 370㎜에 불과했다. 변 교수는 지난 11일 신문의 날씨 칼럼을 통해 "대가뭄의 다음 중심 2015년보다 2, 3년 앞서 2012년부터 대가뭄이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변 교수의 주장처럼 가뭄에 대한 총체적 대비가 시급한 시점이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