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20여년 만에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북한 핵문제, 북미관계, 나아가 남북관계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던지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여전히 가라 앉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이번 조치는 북한이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회생을 위한 극적 기회가 될 수도 있어 보인다.
그동안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은 미국의 대북한 경제제재 및 봉쇄의 핵심 수단으로 효과적으로 기능해왔다. 북한은 이 제재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동안 대외 원조, 대외 교역 및 투자, 금융 거래 등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조치는 단기적으로 북한 경제에 미치는 효과가 적더라도 북한의 국제사회 진입을 통한 정상국가에 이르는 첫 단계에 올랐다는 점에서 중대한 조치로 평가할 수 있다.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주요 합의들인 9·19공동성명(2005년), 2·13합의문(2007년), 10·4 합의(2007년) 등에 따르면 북미 관계 정상화의 첫 단계는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 조치에 따라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지정에서 해제하는 일이었다.
북한은 궁극적으로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열망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높은 장벽을 넘어야 한다. 무엇보다 북한은 검증과 동시에 핵폐기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국제사회는 이럴 가능성에 대해 매우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다. 김정일 정권이 존재하는 한 핵 포기는 기대할 수 없다는 강한 믿음이 존재한다. 이에 따라 북한은 관련 주변국 내부의 보수파들의 반발과 불신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북미관계 정상화에 이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장 미국 내 공화당계 보수파들은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협박에 굴복했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특히 이들은 미국이 이번에 북한과 합의한 북핵 검증합의서에 2002년 시작된 2차 북핵 위기의 원인인 고농축우라늄(HEU)문제는 전혀 명시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의 아소 정부도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납치자 문제 미해결을 이유로 북한의 테러지원국 해제에 반대해 온 일본은 공개적, 노골적으로 미국 정부의 조치에 실망감을 나타냈다. 한국의 보수 정치인들도 정부가 북측으로부터 1987년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사건에 대한 사과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테러국해제를 수용한 것은 잘못됐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미국, 일본, 한국의 보수층을 설득시킬 만한 긍정적인 후속 조치들을 취하지 않는 한 앞 날은 결코 순탄치 않음을 잘 보여준다.
경제적 측면에서의 북한의 향후 과제도 핵 포기 못지 않게 복잡하고 민감한 것들이다. 북한이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에 따른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의 기준에 맞도록 내부 법제도 정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북한도 대외환경 개선과 경제개혁 작업을 동시에 추진함으로써 국제사회로부터 지지와 신뢰를 회복할 때, 국제질서로의 진입을 통한 과실을 챙길 수 있는 셈이다. 여기서도 보수층에서는 북한 핵문제와 비슷하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김정일 정권 아래에서 과연 개혁·개방이 가능하겠느냐는 물음이다.
보수층의 문제의식은 나무라기 힘든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북한 문제를 푸는 데는 모두를 만족시키는 최선의 단일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만 차선이 있을 뿐이다. 북한 정권의 갑작스런 붕괴나 고립봉쇄로 인한 위기 고조가 현재의 한국의 금융위기와 결합되어 경제가 더 추락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번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조치를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을 준비하면서도, 단기적으로 이번 미국의 조치가 북한의 본격적인 핵 폐기와 개혁·개방으로 이어지도록 지혜를 모으는 일이 시급한 과제다.
임을출 교수(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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