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독도왜란'에 즈음하여

입력 2008-10-08 09:24:30

모모세 타다시(百瀨格)란 일본인이 있다. 일본기업의 한국 주재원으로 40년간 우리나라에서 살아온 고희의 이 일본인이 10년 전에 출간했던 책 이름이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 18가지 이유'라는 것이었다.

우리로서는 떨떠름한 제목이었지만 '한국사람이 되고 싶은 일본인'이라는 고백과 함께 잘못된 한국 문화를 진솔하게 꼬집은 이 책이 상당히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책머리에 주목할 만한 일화가 담겨 있었다.

한번은 모모세씨가 한국 친구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당신은 百濟(백제)가 멸망하면서 일본으로 도망간 사람의 후예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소리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선진 일본국민'에게 한반도에서 꽁무니를 뺀 비겁자의 후손이라니….

한데 자신의 성(姓) 모모세(百瀨)가 일본에서도 흔한 성씨가 아닌데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일본의 군마(軍馬)현 다카사키(高崎) 부근의 지형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고 보니,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궁금하던 차에 모모세씨는 어느날 마음먹고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로 내려갔다. 일종의 '뿌리찾기 여행'이었다고 할까. 부여의 한복판에서 그는 말을 탄 계백장군을 목격했고, 그 동상에 새겨진 설명문을 읽는 순간 그만 장군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황산벌 싸움에 출전하기에 앞서 사랑하는 가족을 자기 손으로 베어 죽이고 결사대로 뽑은 5천명의 부하와 함께 5만의 적진에 뛰어들어 용감하게 싸우다 최후를 맞은 猛將(맹장)….' 그는 '계백장군과 5천 결사대'에서 일본 사무라이의 '원조'를 발견한 것이다.

'확 피었다가 지고 마는 벚꽃'으로 상징되는 일본 사무라이 정신의 원류를 떠올린 것이다. 그후로는 자신의 선조가 백제의 유민이고 또 계백장군의 후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도 '황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고백이었다.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들의 '혼네'(本音·속마음)는 이렇게 오늘날 일본의 역사와 문화의 원류가 한반도였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 지도층 인사들의 '다테마에'(建前·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는 이를 애써 거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왜곡하려 든다.

어쩌면 한뿌리였을 수도 있는 한·일 양국민의 증오와 갈등은 여기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일본인은 가슴 한 가장자리에 남아있는 '한반도 도래인'의 후예라는 사실을 철저히 부정하고 싶고, 한국인은 그같은 일본인의 소아병적인 근성에 경멸의 눈길을 보낸다.

그럴수록 한반도를 향한 일본의 침략과 도발이 악랄해지고, 그런 일본이 제아무리 경제대국이고 스스로를 선진국민이라 자부할지라도 우리에게는 그저 '왜적'일 따름인 것이다.

저들이 어머니 같은 나라를 향해 틈만 나면 패륜을 범하는 것도 한반도에서 버림받은 도래인들의 후예라는 뿌리깊은 열등의식에서 발현된 것은 아닌지. 야반도주한 원초적 고향에 대한 애증과 회한을 그런 식으로 돌출시키는 것은 계백장군의 후예답지 못한 소인배들의 짓거리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스스로의 황폐와 파멸로도 이어진다는 역사적 교훈을 알고나 있는지….

매일신문은 최근 또다시 수면위로 떠오른 '독도왜란'에 즈음하여 한국 언론사상 처음으로 독도에 상주기자를 파견했다. 노부모와 처자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40대 후반의 기자를 절해의 고도로 이끈 것은 경술국치 때 절명시를 남기고 순국한 매천 황현의 유서인 '遺子弟書(유자제서)'였다.

"이 나라가 선비를 키워온 지 500년에 나라가 망한 날 선비 하나 책임지고 죽는 이가 없다면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일본이 아무리 물리적인 강국이 될지라도 죽어도 한국을 정신적으로 이길 수 없는 이유를 재확인한다.

모모세씨가 사무라이의 원조국에 황송한 마음을 가졌듯이, 일본은 더이상 적반하장의 악업을 되풀이하지 말고 母土(모토)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도 갖출줄 알아야 한다. 선비의 정신을 이은 기자가 상주하는 독도에 더이상 무도한 칼날을 겨누지 말아야 한다.

조향래 사회2부장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