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기차와 사람① 나원역 최해암 역장

입력 2008-10-02 11:18:46

아무도 없는 경주 현곡면 나원역 대합실에 인터넷 방송 '기차와 소나무'가 울려퍼진다. 인터넷방송이란 용어조차 낯설던 13년 전부터 최해암(56) 나원역장이 하루도 빠짐없이 운영해오고 있는 것으로, 열혈팬들도 꽤 있다.

나원역장, 시인, 소년소녀 가장돕기 카루나모임 회장 등 최 역장의 직함은 참 많다. 꼼꼼히 들여다보면 모두 열차 사랑에서 비롯된 직함들이다.

"1970년대 입사 초기, 당시 철도 역에는 집나온 아이들이 많았어요. 그 아이들을 선도하고 상담해주다 보니 청소년문제에 관심이 생겼죠.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얼마 안가 어려운 아이들이 사라지겠거니' 했지만 갈수록 많아져요. 아직도 점심 못먹는 아이들이 수두룩하니까요. 그것이 가장 안타깝죠,"

이렇게 카루나모임을 만들었고, 지난 20년 동안 쉬는 날이면 소년소녀 가장과 결식아동, 독거노인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봉사한다.

최 역장은 가는 곳 마다 화제를 만들어낸 '창조적 역장'으로도 유명하다. 1990년대 후반 모든 역의 매표소가 꽉 막혀 작은 구멍을 통해 소리를 질러가며 표를 구입해야 했던 시절 최 역장은 과감히 매표창구를 뜯어냈다. '고객이 우선'이란 생각 때문. 또 열차 내에 대중가요를 틀기 시작한 것도 최 역장이다.

또 모량역·건천역과 효자역(포항) 등 가는 역마다 대합실을 작은 공원처럼 꾸몄다. 무료로 책을 빌려주는가 하면 어린이 자연학습장을 만들어 꼬마 손님들의 흥미를 돋웠다. 대합실엔 언제나 음악이 흐른다. 지난해까지 근무했던 안강역에는 갤러리까지 만들어, 지금껏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간 정이 많이 든 안강 사람들은 지금도 기차표를 산다는 명목으로 나원역을 일부러 찾는다. 최 역장은 이미 '보고싶은 이웃'이 됐기 때문. '역은 그 지역의 문화 중심이 돼야 한다'는 최 역장의 지론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지금은 더 이상 여객 손님을 받지 않는 역이지만 나원역 대합실은 깨끗하게 정돈돼 있다. 누구든 책을 빌려가 수 있도록 간이 도서관도 마련돼 있고 음악 신청할 수 있는 코너도 있다. 편히 쉴 수 있는 소파는 물론이다. 하지만 경영수지가 안맞아 올해부터 여객열차가 더 이상 서지 않는다. '정성껏 모시겠습니다'는 푯말이 쓸쓸해보인다.

그래도 최 역장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역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요즘 바쁘다. 역에 전시할 요량으로 오래된 기차표, 각종 기차사진 등을 정리 중이다. '미래의 고객'인 아이들이 나원역으로 소풍올 수 있도록 토끼와 닭이 있는 미니 동물농장도 만들었다.

철도인 36년. 그간 기차역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30여년 전, 통근열차를 세우면 저 멀리 들판에서 하얀 교복 칼라를 나풀거리며 여중생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기차 출발을 1,2분 늦춰서라도 그 학생을 태우고 나면 그렇게 보람있을 수 없었단다. 하지만 이젠 그 붐비던 역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다. '기차냄새가 나고 손님들과 부대껴야 진정한 철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최 역장으로선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최 역장은 출근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철길에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다. 평생 자신과 가족을 먹여살려줬기 때문이란다. 처음엔 무섭기만 하던 기차 소리도 이젠 한없이 다정다감하고 부드럽게만 들린다.

최 역장은 퇴직 후 간이역을 빌려 철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다.

"기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하고 차 마시고 쉴 수 있는 공간에서 기차 사랑의 맥을 이어가고 싶어요."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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