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아내 덕분에 행복하고 고통스런 남자

입력 2008-07-30 06:51:43

아내는 부재중/안토니오 무뇨스 몰리나 지음/ 박지영 옮김/레드박스 펴냄

결혼 생활 6년 차 부부 블랑카와 마리오. 여느 6년 차 부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남자 주인공 마리오가 아내 블랑카를 너무나도 사랑한다는 점이다. 그는 늘 아내를 살피고 눈치를 본다. 아내의 사소한 모든 것을 사랑하고, 그녀의 괴팍한 습성까지 사랑한다.

아내는 자신보다 키가 크다. 게다가 엄청난 미인이며 부르주아 출신의 인텔리다. 그는 아내의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 신경 쓴다.

남편 마리오는 가난한 산골 출신으로 평범한 시청 공무원이다. 그는 오후 3시쯤이면 정확하게 퇴근하고 곧바로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간다. 그는 직장의 일을, 스트레스를 집으로 가져와 아내 앞에 풀어놓지 않는다. 다른 남자들과 달리 술을 진탕 퍼마시지도 않는다. 입에 담배를 물고 침을 튀기며 축구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다. 낯선 여자가 지나갈 때 휘파람을 불어대며 여자에 굶주린 티를 내지도 않는다. 그는 세상의 모든 여자를 무시하고 오직 아내만 원하고 사랑한다.

마리오는 음악회 중간 휴식 시간에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박수를 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무식이 드러날까 두려워 전전긍긍한다. 마리오는 손을 직접 대지 않고 칼과 나이프로 오렌지를 잘라 먹는 아내 블랑카의 모습에 경탄한다. 그는 아내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문화를 즐기는 척하느라 마음속으로 전쟁을 치른다.

마리오는 아내를 사랑하며 집착한다. 더불어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버림받을까봐 노심초사한다. 그는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아내를 만족시키고 정복하는 데 쏟는다. 아내 덕분에 그는 행복하고 고통스럽다.

아내 블랑카는 무심해 보인다. 그녀는 고급스러운 취미를 가졌으며, 낭만적이고 예술적이며 귀족적이다. 상류층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은 엘리트다. 그녀는 음악, 미술, 영화, 춤 등 각종 예술에 조예가 깊다. 유명 예술인들과 어울리며 부르주아식 삶을 즐길 뿐만 아니라 마리오를 만나기 전까지 타락한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

블랑카의 낭만적 생활은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남편 마리오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늘 '먼 데'를 본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은 이른바 예술가들이다. 사진가, 영화감독 지망생, 푸치니에 심취한 대학교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마리오의 눈에 그들은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있다. 블랑카의 전 남자친구 지미 엔은 고집불통에 악동 예술가며 시니컬한 이미지를 팔아 돈을 버는 데 급급한 인물이다. 그는 겉으로 멋진 보헤미안 예술가인 척하지만 사실은 여자친구인 블랑카의 노동력을 착취해 자신의 이익을 올리는 이기주의자이다. 그는 알코올과 하시시(마약), 남창을 즐기는 타락한 괴짜일 뿐이다. 블랑카는 지미 엔뿐만 아니라 여러 남자들과 문란한 생활을 해왔음이 틀림없다. 마리오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럼에도 아내를 사랑한다. 오히려 아내가 떠나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두 사람은 어울릴 만한 구석이 없다. 어느 날 마리오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블랑카를 발견하고 그녀를 돌봐주다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결혼했고 6년이 지났다. 6년 동안 마리오는 하루 10시간을 아내 블랑카에게 바쳐왔다. 근무시간을 뺀 모든 시간을 아내를 위해 바쳤다. 위태롭지만 부부의 삶은 무난하게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 블랑카가 집을 나가버렸다.

소설은 여기서부터 시작돼 역순으로 진행된다. 블랑카가 집을 나가버린 후 마리오는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아내 블랑카와 꼭 닮은 여자가 집으로 들어와 블랑카 행세를 한다.(소설은 블랑카가 집을 나간 뒤 들어온 블랑카와 꼭 닮은 여성이 진짜 블랑카인지 아닌지 꼭 집어서 설명하지 않는다. 블랑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는 블랑카에 집착해온 마리오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리오의 시점에서 펼쳐진다. 이야기 대부분은 블랑카가 얼마나 지적이고 우아하며 매력적인 여성인지 설명하는 내용이다. 더불어 블랑카를 사랑하는 만큼 고통당해야 하는 마리오의 심정을 드러낸다. 그는 가출했다가 돌아온 블랑카를, 블랑카가 아닌 다른 여성이라고 간주한다. 미세한 차이점을 들먹이며 '블랑카는 떠났으며 지금 내 앞에 선 여자는 다른 여자다'고 체념한다. 블랑카를 너무나 사랑한 탓에 행복하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웠던 그는 '블랑카를 타인으로 규정'하는 쪽을 택한 셈이다.

촌뜨기로 시청 공무원인 당신, 독자들은 어떠신지?

당신이라면 어떤 아내(혹은 남편)와 살고 싶을까. 블랑카처럼 언제나 허리를 곧게 세우고 식사를 하는 아내, 손대지 않고 칼과 포크만으로 오렌지나 감을 자르는 우아한 배우자는 부담스러울까? 행동거지가 고대 예배의식처럼 우아한 배우자는 힘들까? 고상한 이야기 말고 촌뜨기 출신인 내가 관심을 갖고 있으며, 알아들을 만한 이야기만 하는 배우자가 나을까? 내 열등감을 자극하는 사람보다는 나랑 엇비슷한 사람이 나을까? 아무래도 나는 '직장과 집' '정해진 동선'을 따라다니는 사람이니 알코올과 하시시 혹은 미술이나 음악에 심취한 배우자는 버거울까?

아름답고 똑똑하고, 낭만적이고, 부유하고, 늘씬한 사람은 노리는 사람이 많을 테니 부담스러울까? 그래서 대충 생기고 무식하고, 아무 데서나, 아무 것이나 잘 먹는 배우자가 나을까. 지겨운 클래식 대신 트로트를 즐기는 배우자가 나을까? 잘난 사람이라서 '내일이라도 당장 나를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되는 배우자보다는 목줄을 풀어놓아도 갈 곳이 없는 배우자가 나을까? 언제나 남의 눈에 띄는 사람보다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사람이 나을까? 나를 차버릴지 모를 사람보다는 언제라도 '내가 차버릴 만한' 사람이 나을까?

'아무렴 연애도 아니고, 한평생 함께 살아야 할 사람인데…. 너무 잘난 사람도 좀 그렇지 않나….' 싶으신가?

이 소설 '아내는 부재중'을 읽으면 떠오르는 생각들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마리오에게 다시 기회를 준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기자라면 내일 버림받더라도 우아하고 잘나고, 늘씬하고 지적이고, 낭만적이고 돈 많은 배우자를 선택하겠다. 144쪽, 9천5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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