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른 누에고치, 다함께 실 한번 뽑아볼까
개인주의, 독신주의, 이기주의, 홀몸노인…. 온통 홀로 사는 세상인 듯하다. 그렇지만 사회가 팍팍하고 삶이 어려울수록 인간의 정(情)이 더욱 그립다. 지역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단체·모임을 찾아 그들이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공부하는 새로운 교육을 원하는 신(新)맹모들이 늘고 있다. 공동육아는 대표적인 신교육의 산실이다. 공동육아는 개개인의 힘으로는 엄두를 내기 어렵지만 여러 가족이 힘을 보태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한다.
◆자연과 더불어…
지난달 26일 대구 수성구 시지동 '씩씩한 어린이집' 앞. 입구에 '우리집은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반대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건물 안에선 시끌벅적한 아이들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입구에 들어서자 60㎡ 남짓한 공부방에는 엎드린 아이, 쪼그려 앉은 아이, 무릎을 꿇고 두 눈을 가린 아이까지 퍼포먼스 공연을 하듯 몸짓 발짓을 동원해 무엇인가 표현하려 애쓰고 있었다.
"어떤 모양이 안에 있을까?"
선생님이 묻자 아이들은 제각각 동작을 바꿔 보였다. 이날 수업은 지난달 말부터 키운 누에고치 실을 뽑아 보는 시간이었다. 앉은뱅이 책상 위에 놓인 간이 가스레인지 위 냄비에선 벌써부터 보글보글 물이 끓고 있다. 실을 뽑기 위해선 메추리알 만한 크기의 하얀 고치를 삶아야 한다.
"그럼 누에가 아프잖아요."
선생님의 말에 한 아이가 걱정하자 '눈물반' 재웅(6)이가 말했다. "우리가 박사가 돼 누에를 고쳐주면 되잖아. '꼬꼬' 우리가 고칠 수 있죠?"
이곳에선 '선생님'이란 단어가 없고 아이들이 지어준 별명을 쓴다. '꼬꼬'는 엄마 닭처럼 아이들을 보살펴 준다는 의미에서 아이들이 서영예 원장에게 지어준 별명이다. 꼬꼬 외에도 후크선장, 은방울, 바다, 고래, 솜사탕(선생님)이 있다. 솜사탕은 어느 선생님을 가리킬까? 정답은 매일 맛있는 간식과 밥을 만들어 주는 영양사 선생님이다.
어린이집 마당의 텃밭에는 뙤약볕 아래 피망, 고추, 오이, 상추, 깻잎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고 지난 4월 아빠들이 구해온 벼도 고무대야에 촘촘히 심겨져 있었다.
만 2세부터 7세까지의 아이들은 오전 7시 30분∼오후 4시 30까지 이곳에서 배우고, 이곳을 졸업한 초교생들은 4시 30분∼오후 7시까지 몸과 마음을 살찌우고 있다.
교육 프로그램은 같이 책 읽기, 동화구연 듣기, 나들이 가기, 전통놀이하기 등이고 영어, 수학 등 주입식 교육은 없다. 야외 수업을 갈 때면 부모들이 동행한다. 골목 바닥에 분필로 그림을 그려놓고 비석치기도 하고 고무줄 놀이도 한다.
새싹반에서 34∼36개월 된 아이들을 가르치는 '고래' 박정옥(58·여)씨는 "대학생인 우리 아이들이 진작 이런 교육을 받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며 "자연과 함께 자라는 아이들이어서 항상 밝고 건강하다"고 했다.
◆부모도 함께 자란다?
씩씩한 어린이집은 부모들이 운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특징이다.
6명의 부모들이 지난 1994년 '대구공동육아협동조합' 추진위를 결성해 어린이집을 만들었다. 보육교사는 물론이고 원장까지 부모들이 고용한다. 학부모들은 운영위원회에 꼭 참여하고 교육 프로그램과 어린이집 운영 전반에 대한 의결·결정권을 가진다.
휴일에는 '아마(아빠 엄마 모임)' 활동을 통해 페인트 칠은 물론이고 놀이터에 깔려 있는 모래도 소독한다. 자기 아이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때문에 이곳에선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내 자식'이다.
유택규(43) 조합장은 "학부모 개개인이 주인이자 선생님이고 아이들도 부모가 따로 없고 모두 우리 자식으로 생각한다"며 "어른들이 아이들과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써 배우는 게 많다"고 말했다. 이곳에선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자란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지난 주말 '천을산 살리기' 운동에 참가한 한 학부모는 덤불 속 둥지를 발견한 아이들이 즉석토론회를 여는 걸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목소리만 크게 지르면 이긴다는 어른들의 고정관념과는 달리 아이들이 차근차근 자신의 주장을 펴며 토론하는 모습에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임상준기자 zzuny@msnet.co.kr
♠ '공동육아' 학부모 생각은?
"경쟁에서 1등하는 아이보다는 남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어요."
공동육아는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건물 마련부터 교육 프로그램, 청소, 통학에 이르기까지 부모가 몸소 나서야 한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동안 부모는 잠시 '해방의 시간'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부모들이 '공동육아'를 시도하는 것은 "아이 뿐 아니라 부모까지도 함께 자라는 행복 교육법"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씩씩한 어린이집'(수성구 시지동) 학부모인 박환순(40·여·경산시 압량면)씨는 "아이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부모가 배우는 것이 더 큰 것 같다"고 털어놨다. 맞벌이를 하는 힘겨운 일상이지만 공동육아에서 맡은 임무가 있다보니 어떻게든 아이와 접촉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 속에서 차츰차츰 아이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부모가 돼 간다는 것이다.
씩씩한 어린이집을 거쳐 이제는 '해바라기 방과후 학교'의 학부모가 된 송위식(41·수성구 시지동)씨는 "이제는 육아를 개인의 문제로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봐야한다"며 "내 아이만 키우는 게 아니라 어울려 함께 키우자는 것이 공동육아의 취지"라고 했다. 수백만원의 조합원 비를 두고 '일부 부유층의 별난 교육법'이라고 편견어린 시선도 있지만 송씨는 "어린이집 건물 마련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며 "최근에는 정부 지원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어 더욱 싼 비용으로 공동육아가 가능해 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마어린이집'(북구 국우동) 학부모인 강혜진(40·여·북구 구암동)씨는 "엄마의 역할이 어떤 것인가, 어떻게 해할지 고민하고 힘들어하다 공동육아를 통해 함께 고민을 해결했다"며 털어놨다. 강 씨는 "아이의 성적이 뒤처지면 어떻게 하느냐는 주위의 걱정어린 시선도 있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며 "공부를 강조하기보다는 아이가 또래에서 누려야 할 즐거움을 충분히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자기주도적 학습 태도를 키워 오히려 학습성적도 뛰어난 편"이라고 자랑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 서영예 '씩씩한 어린이집' 원장
"아이 하나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음이 필요하지요."
씩씩한 어린이집 서영예(46) 원장은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자연과 더불어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릴 때부터 초록과 자연을 접하면서 자란 아이들은 정서적으로도 넉넉하고 안정돼 있어요. 자연에서 배우니까 당연히 생명의 대한 소중함도 깨닫게 됩니다."
"60, 70년대만 해도 이웃과 서로 맡아가며 아이를 키웠잖아요. 아이들은 골목에 나가 마음껏 뛰어놀았는데 요즘은 아파트 세대가 늘다보니 이런 육아가 불가능해요."
자연과 인성에 기초한 공동육아를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어 단어 한 개, 수학 공식 하나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공동체의 중요성을 알고 함께 어울려 생활하는 법을 배워야 올바른 인간으로 커 갈 수 있지 않을까요?"
때문에 이곳에선 한글이나 숫자 교육은 금물이다. 아이들을 건물 안에 가둬놓지 않고 들과 산에서 뛰어놀도록 하고 있다.
때때로 주위의 눈총을 받기도 한다. 공동육아는 일부 부유층,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냐는 것이다. "정말 모르는 소리예요. 아이들이 다른 곳에 견학 가면 '시설에서 나왔느냐'고 물어 볼 정도로 학부모들이 검소하고 아이들끼리 옷을 물려 입고 있어요."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일반 유치원과 달리 수익을 내는 구조가 아니다. 조합원들의 생활형편에 따라서 회비도 차등을 두기도 한다. '학부모들이 더 써야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정성'이라는 서 원장은 "우리 아이들에게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따뜻한 미래를 선물할 수 있도록 교육의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임상준기자 zzu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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