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 이제 그만 촛불을 끄자

입력 2008-06-16 11:05:00

일단 MB정부 반성시간 주고 안팎 난제 해결에 지혜 모으자

프랑스의 위대한 화가 '앙느 루이 지로데'는 촛불을 애용했다고 한다. 밤 늦게 그림을 그렸던 그는 모자를 촛대로 사용했다.

전기가 없던 18세기 화실에다 챙이 넓은 큰 모자를 두고 작업 때마다 모자챙 둘레에 40개의 촛대를 붙여놓고 촛불을 켠 모자를 쓴 채 그림을 그렸다.

지로데의 촛불 작업이 유명해진 것은 모자 촛대의 패션 때문만이 아니라 심혈을 기울인 최고의 걸작을 그릴 때만 40개의 촛불을 모두 다 켰다는 데 있다. 내키잖은 작품을 그릴 때는 촛불을 다 켜지 않았고 그림값도 그림을 그릴 동안 모자 위에 켜뒀던 촛불의 수효에 따라서 다르게 값을 매겼다.

그에게 촛불은 촛불 앞에 드러나는 형상과 아름다움을 찾아내기 위한 빛으로서의 도구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지로데 같은 奇人(기인) 예술가가 아닌 보통사람들도 촛불에서는 관솔불이나 화톳불과 다른 뭔가 典雅(전아)하고 외경스러운 이미지를 품는다.

전깃불이나 가스등불이 죽은 불이라면 촛불은 문틈의 가벼운 바람결만 스쳐도 흔들릴 줄 아는 생명이 있는 불이기도 하다. 어느 누구도 첫날밤 洞房(동방)에 관솔불을 태우고 싶은 이는 없다. 기도하는 제단이나 혼례식장의 점촉대에 촛불을 켤 때 경망스럽거나 장난스런 마음으로 불을 켜는 이도 없다.

심지에 불이 켜질 때까지 오직 집중된 호흡과 시선으로 염원을 모은다. 경건하고 진실되며 邪念(사념)이 없다. 더 위대한 작품을 그릴 때는 좀 더 밝은 빛으로 형상 속을 뚫어 찾아내 보려 더 많은 촛불을 켠 화가의 魂(혼)도 바로 그러한 촛불에 대한 경외로움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50여 일째 촛불을 켜고 있다. 그러나 계속 켜야 하느냐, 이제는 그만 끄야 하느냐는 결론을 합의하기에는 아직 민심이 갈려 있다.

촛불을 켜게 만든 지도자도 아직 민심 바닥에 남아있는 속불씨는 꺼주지 못한 채 물대포로 겉불만 끄려 하고 있다. 정치판은 의사당 아닌 길거리로 나왔다. 그런 갈등이 세월을 좀먹어가고 있을 동안 해만 지면 촛불은 다시 켜지고 광장의 잔디들은 촛농에 죽어간다.

부두와 건설현장은 물류대란으로 '세상이 멈춰지고' 있다. 이제 언제까지 촛불만 쥐고 있어야 할 것인가를 놓고 제단에 촛불을 켜는 심경으로 돌아볼 때가 됐다.

이제 그만큼 했으니 일단 촛불은 끄자고 하면 댓글에 난리가 날지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끄야 하고 가능하다면 빨리 추스르고 끌수록 우리 모두를 위하는 것이 된다. 현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어제 낮 어느 케이블TV에서 '촛불시위 끝장토론'이란 프로를 방영했다. '지금 촛불시위 토론에서 과연 끝장이 날 수 있느냐'는 게 결론이라면 결론이었다. 그렇다. 아무도 촛불을 끄는 게 옳은지 계속 켜는 게 옳은지 깨끗이 결론 내고 끝장낼 귀신 같은 토론의 논리는 나올 수가 없다. 촛불과 맞불이 존재하는 한 촛불 논란은 토론이 아닌 촛불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촛불은 양쪽 끝을 동시에 켤 수는 없다'는 지혜다.

서로 제 쪽에 불을 켜야 옳다는 상반된 異見(이견)에서 한발 물러나줌으로써 相生(상생)을 찾자는 거다.

이제 제단에 불을 켜듯, 자식의 결혼식장에 촛대를 밝히듯 경건하고 邪念 없는 가슴과 이성으로 광장의 촛불도 함께 다시 생각해 보자.

MB정부의 오만을 용서하고 반성과 개선의 기회를 준 뒤 그래도 안 되면 그때 다시 촛불 아닌 횃불을 들더라도 지금은 그만 촛불을 끄고 추스르자. 그리고 한숨 돌리고 기다려 보는 건 어떨까. 5천만이 호흡과 시선을 한데 모아야 다 같이 살아갈 수 있는 나라 안팎의 난제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金 廷 吉 명예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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