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휴브리스와 유권자의 주권의식

입력 2008-06-10 07:00:00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촉발된 촛불시위가 한 달이 넘게 이어지고 있다. 72시간 릴레이 촛불시위에 이어 오늘 100만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를 예고하고 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미국산 쇠고기가 국산이나 호주산에 비해 그토록 위험한가? 근래에 드물게 압도적 표차로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100일 만에 그토록 큰 잘못을 범한 것인가?

고대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휴브리스(hubris)라는 단어가 있다. 권력자의 자기도취, 그에 따른 오만과 안하무인적 행동을 일컫는 말이다. 대개는 절제를 잃고 비극으로 끝난다. 역사 속에서 나폴레옹이 대표적 예로 꼽힌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도 우리 역사 속의 예다. 혹자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미국의 힘에 도취한 부시 대통령과 네오콘 측근들의 휴브리스로 설명하기도 한다.

휴브리스는 권력자라면 누구나 빠지는 함정이다. 권력이 강대할수록, 어렵게 쟁취한 권력일수록 쉽게 빠진다. 타협에 익숙한 정치인보다 비정치인들이 권력을 잡으면 더 그렇다. 권력자의 측근이 빠지기도 한다. 유신말기의 차지철, 5공시대의 정치군인들이 그랬다. 민주화 이후에는 '황태자' 소리를 들은 대통령의 가족이 그랬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점령군'같은 행태를 보이는 것도 휴브리스의 일종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측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나라당 경선에서 결코 쉽지 않은 박근혜 전 대표를 눌렀다. BBK를 비롯한 온갖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과반에 근접하는 득표율로 당선됐다. 부처님과 예수님, 심지어 알라신과 용왕님이 보우했다고 하는 우스개도 있었다. '좌파정권' 10년의 실정을 일소할 민심과 천심을 함께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은 민심과 천심을 업고 '어린 백성'을 이끌어 선진국가로 도약할 역사적 임무를 진 대통령이다.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권력의 독점은 당연하다. 경선에서 진 박 전 대표 계열은 동참할 자격이 없다. 대선에서 진 야당은 패배의 대가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한 생각이 인사과정, 공천과정, 정책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국민이 보기에 참으로 가당찮은 행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다. 대통령의 권력은 정적으로부터 쟁취한 것이 아니다. 국민이 한시적으로, 조건부로 부여한 것일 뿐이다. 그것을 자기 것인 양 설치는 모습은 도저히 못 봐준다.

그 생각의 일단이 4·9총선으로 나타났다. 구정권에서 어깨에 힘깨나 준 정치인들은 죄다 낙선했다. 새 정권에서 실세라고 설치던 인물들도 모두 낙선했다. '친박연대'라는 황당한 이름의 정당에 표를 몰아줬다.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지난 수년간 그 많던 재보선에서 여당이 이긴 적이 없다.

지금의 위기는 집권자의 휴브리스와 유권자의 주인의식이 충돌한 결과다. 그 여파가 우려된다. '외교국가'로서 숙명을 지닌 우리나라에 가장 중요한 대외관계인 한미관계가 위기정국의 볼모가 됐다. 유가가 급등하여 물가가 치솟고 있고 북한의 핵과 식량난으로 한반도 정세도 불안한 와중에 국회는 개원도 않고 나라는 표류하고 있다. 왜 이런가?

첫째, 헌법상 막강한 권력과 5년의 임기를 보장받은 대통령제의 병폐다. 이 경우 대통령이 국민으로부터 포괄적 위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학자들이 '위임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경우 휴브리스의 여지가 매우 높다.

둘째, 잦은 선거를 통한 국민의 주인의식, 곧 국민정체성의 고양이다. 우리나라는 대선, 총선, 지방선거가 엇물려 돌아가면서 대규모 선거가 매우 잦다. 그것을 통해 주인의 권한을 행사하고 그 의식을 더욱 키웠다. 무서운 주인이 됐다.

셋째, 대의정치의 실종이다. 무서운 유권자의 선거심판이 끊이지 않으니 정치인들은 몸둘 데를 모른다. 눈앞의 표만 의식하는 포퓰리스트가 됐다. 민생을 따지며 행정부를 견제하는 본연의 임무는 사라졌다. '참여'정부의 정치전략도 일조했다.

원인이 이처럼 근원적이니 위기는 앞으로도 자주 일어날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체제에 대한 재검토가 요구된다.

김태현 중앙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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