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김훈의 '칼의 노래'⑩

입력 2008-05-13 07:08:56

사실 나는 무인된 자의 마지막 사치로서, 나의 생애에서 이기고 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나는 다만 무력할 수 있는 무인이기를 바랐다. 바다에서, 나의 무(武)의 위치는 적의 위치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마지막 사치는 성립될 수 없었다. …바다에서 나는 늘 머물 곳 없었고, 내가 몸 둘 곳 없어 뒤채는 밤에도 내 고단한 함대는 곤히 잠들었다.(김훈, 부분)

죽이고 죽는 것이 일상인 전장에서 이기고 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나아가 무력할 수 있는 무인을 바라는 것은 무인으로서는 사치이다. 전장에서의 통제사의 위치는 단지 적의 위치에 의하여 결정될 뿐이었다. 적이 없으면 나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 전장이다. 하지만 통제사에게는 사방이 적이었다. 결국 통제사의 마지막 사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다에서 머물 곳 없는 통제사는 고단한 함대가 곤히 잠든 밤에도 몸 둘 곳 없어 뒤채었다. 통제사가 그렇게 수많은 밤을 뒤채었던 곳. 그가 아직도 살아있을 것 같은 제승당으로 간다. 오른편에 한산도 앞바다를 끼고 반원을 그리며 제승당 가는 길이 열려 있었다. 길 옆에 누운 바다에는 밀물이 들어오는지 먼지 같은 부유물이 물 위에 떠 있었다. 그 아래 바닷물은 맑다. 맑은 바닷물 위에서 가라앉지 못하고 떠도는 부유물이 내 삶과 같아서 다시 쓸쓸했다.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김훈, 부분)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에서 생성보다는 소멸을 먼저 떠올려야 했던 통제사의 절박함이 쓸쓸했다. 스스로 소멸하고 싶어도 소멸할 수 없는 통제사의 마음이 가슴 아팠다. 적이 존재하는 한 자신도 존재해야 하니까. 가는 길에 여전히 옛날 그 자리에 있는 우물물을 들이켰으나 쓸쓸함과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대첩문을 지났다. 높이 자란 소나무가 나를 쓸쓸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길가에는 이름도 모를 들꽃들이 곳곳에 핏빛으로 피어났다.

드디어 나타난 제법 넓은 뜰. '制勝堂'(제승당)이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이 정면에 나타났다. 승리를 만드는 집. 제승당으로 다가갔다. 제승당은 한산도 통제영의 중심 건물로 통제사 이순신의 집무실이자 그가 참모들과 작전을 수립하던 곳으로 본래의 이름은 '운주당'이었다. 하지만 원균의 칠천량 해전 참패로 한산진영이 불타 폐허가 되었다. 그로부터 142년이 지난 1739년, 제107대 통제사 조경이 통제사 이순신의 뜻을 기려 운주당 옛 터에 다시 건물을 세워 제승당이라 했다. 결국 제승당은 통제사의 명예와 절망이 함께 존재하는 건물이다. 단층의 낮은 화강암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올라앉은 건물에는 노량해전, 사천해전 등 이순신 장군의 주요 전투를 그린 5폭의 그림과 거북선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통제사의 마음을 남은 흔적으로나마 만나러 온 사람에게 건물은 오히려 장애이기도 하다.

충무문을 지나 왼편의 충무사로 바로 향했다. 충무사는 통제사의 사당이다.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연기 가운데로 정면에 마주한 통제사의 모습이 보였다.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여전한 모습으로 거기에 계신 통제사가 부럽기도 했다. 그런 마음의 움직임은 통제사를 만나러 온 내 마음의 본질은 아니다. 내가 통제사를 부러워하거나 질투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충무사 뜰에 내려섰다. 오고 가는 많은 관광객들 중에서 난 이방인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어느 아버지가 통제사와 제승당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사실 아무런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형언할 수 없는 쓸쓸함으로 결국 충무사 뜰 앞 '제승당유허비' 앞에 주저앉아 버렸다. 제승당유허비에는 세월이 지날수록 자라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통제사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세월에 따라 퇴락해가는 제승당 터에 대한 안타까움과 통제사에 대한 조선 민중의 변함없는 사랑을 담아낸 비문이 사뭇 뭉클하게 가슴으로 다가왔다.

이제 다시 수백년이 지나 주춧돌은 옮겨지고 우물과 부엌마저 메워졌건만 아득한 파도너머 우거진 송백 속에 어부와 초동들은 아직도 손가락으로 제승당 옛터를 가리켜 주니 백성들은 이같이 오래도록 잊어버리지 못하나 보다.(제승당 유허비 비문 부분)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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