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의 이곳에서 나는 얼마나 눈에 띄는 존재인가…
"총은 갖고 들어오지 마시오."
동아프리카의 작은 내륙 국가 부룬디의 수도 부줌부라에는 버스나 식당 유리창마다 특별한 '경고사인'이 붙어 있다. 언뜻 보면 금연 표시 같은데 자세히 보면 빨간색 ×선이 뚝 가로지른 빨간색 동그라미 안에 담배 대신 시커먼 장총 한 자루가 들어 있다.
"저게 뭐죠?"
부줌부라 시내의 식당 종업원은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흘깃 보더니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총 갖고 들어오지 말라는 거죠." 세상에, 이 도시엔 총을 갖고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기에 저런 '총 금지 딱지'가 널려있는 것일까. 평생 소총 한 자루 구경하지 못한 한국여자인 나로서는 심장마비에 걸릴 만한 일이다. 총 금지 딱지가 붙어있는 창가에서 사람들은 모두 맛나게 스파게티를 먹고 있었다.
식당 분위기는 우리나라 국도변 휴게소처럼 어수선한데 손님들은 대부분 잘 차려입은 서양인들이다. 이 식당은 부줌부라 시내를 30분이 넘도록 헤매면서 그나마 음식값이 만만해보인다 싶어 들어온 곳이다. 하지만 종업원이 들고온 메뉴의 대부분은 서울의 웬만한 레스토랑만큼이나 값이 비싸다.
불과 몇해 전에서야 오랜 내전이 끝난 부룬디는 아직까지 물자부족, 식량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부줌부라에 딱 하나 있는 서양식 슈퍼마켓에는 콜라 캔 하나가 2천원이 넘지만 대부분의 부룬디인들은 노점상의 1원짜리 바나나 한개도 사먹지 못하고 배를 곯는다. 식당의 비싼 음식과 2천원짜리 콜라 캔은 이 곳에 살고 있는 서양인들을 위해 유럽과 아시아에서 공수해온 것들이다.
비싼 스파게티는 맛이 없었다. 우아하게 앉아있는 서양인들 틈에서 홀로 꾀죄죄한 배낭여행자의 몰골로 앉아 먹은 탓인지 더 맛이 없었다. 그리고 식당 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아프리카 최빈국에서 아프리카 여행 중 최고로 럭셔리한 점심을 먹은 대가를 치렀다.
식당 앞 거리에는 먼지바람이 불어왔다. 차가 없어 황량한 대로변에 낮은 건물들이 납작하게 엎드려 바람을 맞는다.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시내버스에서는 불쾌한 기름냄새와 지독한 매연냄새가 났다. 나는 오랜 여행으로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겉옷을 쓸데없이 툭툭 털어냈다.
그 때였다. 제 몸보다 크고 낡은 티셔츠를 입은 맨발의 꼬마들이 떼지어 몰려오더니 순식간에 나를 빙 둘러선다. 꼬마들은 서로를 밀치며 악착같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꼬마들의 작은 손이지만 이렇게 많은 손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건 강도를 만나는 것 만큼이나 무섭다. 하지만 잠시 후 더 무서운, 아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프리카 여행 7개월여만에 드디어 내 코 앞에서 '총부리'를 본 것이다.
꼬마들의 손에 둘러싸여 공포에 질려있던 그 때 갑자기 시커먼 무언가가 사정없이 꼬마들의 어깨를 밀쳐내며 괴물처럼 달려들었다. 내 코 앞에서 멈춘 그건 진짜 총이었다. 곧이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소름끼치도록 소리치는 군복 입은 남자가 보였다. 나는 기절할 지경이 되었다.
"아유 오케이?(괜찮니?)" 총을 휘두르던 남자가 나를 향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부줌부라는 외국인이 드나드는 이런 비싼 식당 앞에 늘 헐벗은 꼬마들이 진을 치고 있으며, 총을 든 남자들이 헐벗은 꼬마들로부터 외국인을 보호해주는 도시였다. 총을 멘 남자들은 정부기관이나 은행뿐만 아니라 슈퍼마켓이나 PC방, 심지어 배낭여행자들이 묵는 작은 게스트하우스 앞에도(외국인이 드나드는 곳이면 어디든지) 있다.
나는 문득 내가 이 도시에서 얼마나 눈에 띄는 존재인지를 깨닫고 당황했다. 이 도시 어디에서도 내 면바지의 선명한 하늘빛이나 내 가방의 새파란색, 내 운동화 뒤축의 형광오렌지색 같은 색깔은 없다. 온통 우중충한 회색과 황토색으로 덮여 있으며 지나는 행인들의 옷 색깔도 빛바랜 무채색 일색인 도시, 슬쩍 닿기만 해도 손바닥 가득 먼지가 묻어날 것 같은 부줌부라의 풍경 속에서 나는 '흑백필름 속에서 저 혼자 총천연색 칼라로 움직이는 반칙'을 저지르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나는 가방을 쌌다. 그리고 부줌부라를 떠났다.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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