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땅 가야산] (35)가야산에 은둔한 최치원

입력 2008-03-10 07:42:38

신라말 혼란 피해 홍류동 골짜기 은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골품제 탓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지만 그만큼 후세인들에게 추앙을 받는 인물도 드물다. "최치원은 천황(天荒)을 깨치는 큰 공이 있었으므로 우리나라 학자들이 모두 종장(宗匠)으로 삼았다."(이규보의 '백운소설') "문장으로 어느 누가 중화를 움직였나. 청하(淸河)의 치원이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네"(이승휴의 '제왕운기') "최고운을 생각해보니/ 문장으로 중국땅을 진동시켰네/ 무명옷 입고 갔다가 비단옷 입고 돌아오니/ 나이는 스물아홉이 못되었네."(정지상의 시)

설총과 더불어 신라의 이군자(二君子)로 불리는 최치원은 좌절한 지식인의 전형이랄 수 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린 후 학처럼 구름처럼 전국을 자유로이 떠돌았다. 우리나라 곳곳을 주유하다 보니 그와 관련된 유적이 50여곳이나 된다. 경주 금오산(남산) 아래에는 고운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글을 올린 곳이라는 상서장이 있고, 부산 해운대는 그의 자(字) 해운(海雲)에서 지명이 유래됐다. 특히 고운은 가야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속세를 피해 그가 마지막 은둔처로 삼은 곳이 바로 가야산이었고, 가야산에서 그 행적을 마감한 것이다.

고운의 마지막 흔적, 천년 수령을 지닌 전나무!

천년고찰 해인사(海印寺)의 주법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에서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장경판전 가는 길. 작은 언덕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공사를 위해 쳐놓은 가림막의 쪽문을 열고 언덕에 오른다. 학사대(學士臺)다. 학사대라는 이름은 고운이 역임한 신라 한림학사란 벼슬에서 따왔다. 학사대에는 거대한 전나무 하나가 위엄있게 서 있다. 고운이 꽂은 지팡이가 자랐다는 수령이 1천년 이상 된 고목이다. 높이가 약 30m, 둘레가 5.1m 정도 되는 이 고목은 나무줄기가 지상 10m 높이에서 두개로 벌어져 있어 신비롭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전나무는 고운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이다. 말년에 고운은 제자들 앞에서 학사대에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살아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래서 이 전나무를 일러 고운 선생의 '지팡이 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운의 마지막은 학사대 전나무에서 보듯 다분히 전설적이다. 일부에서는 그가 우화등선(羽化登仙)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숲 속에 갓과 신발을 남겨둔 채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운이 가야산에 은거하게 된 사연도 후세인들에겐 드라마틱하게 다가온다. 고운이 쓴 글에 '계림황엽(鷄林黃葉) 곡령청송(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국운이 기우는 신라(계림)와 갈수록 세력이 커져가는 송악(곡령)을 빗댄 것. 천년사직을 지닌 신라가 사양길에 접어든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쓴 글이지만 아첨배는 물론 신라의 왕도 고운을 경계했다. 결국 처자를 거느리고 가야산에 입산했다.

산에 들어오는 도중, 한 노승이 산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고운은 절절한 심경을 담은 입산시(入山詩)를 남긴다. "스님이여 말씀마오 청산이 좋다고/ 산이 좋다면서 왜 다시 산을 나오나/ 저 뒷날 내 종적을 시험삼아 보게/ 한번 들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 속세의 어지러움에 다시는 휩쓸리지 않겠다는 그의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농산정과 고운암!

857년에 태어난 고운은 최언위, 최승우와 함께 신라말 '삼최(三崔)'라 불리며,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드러냈다. 13에 당나라에 유학을 가 18세에 빈공과에 합격했고, 승무랑시어사내봉공까지 승진했다. 특히 20대에 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중국에서 고운의 명성을 드높였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고 싶어 할 뿐만 아니라 땅의 귀신들도 너를 죽이고자 의논하였을 터…." 농민 반란을 주도, 장안에 정권을 세우기도 했던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 혼비백산, 자기도 모르게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유명하다.

당나라에서 승승장구한 고운이었지만 신라로 돌아온 후 그의 삶은 불우했다. 6두품이었기에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많은 제약이 뒤따랐다. 왕에게 시무10조를 올리는 등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힘을 쏟았지만 허사로 돌아갔다. 그 고단한 심경을 담은 한시가 전해온다. "가을바람에 괴로이 시를 읊건만/ 세상엔 날 알아주는 벗이 없어라/ 창 밖에는 깊은 밤 비 내리는데/ 등불 앞 내 마음은 만리 먼 곳에."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온 후 쓸쓸히 지내던 고운이 당나라의 벗들을 그리워하며 쓴 것으로 짐작되는 시다.

붉은 단풍이 아름다운 가야산 홍류동 계곡. 전국의 경승지를 주유하다 가야산에 은거한 고운은 홍류동 곳곳에 자취를 남겼다. 무릉교(武陵橋)로부터 회선암(會仙岩)에 이르기까지 고운은 경치가 빼어난 곳마다 일일이 이름을 지었고, 그 명칭이 지금까지 그대로 불리고 있다. 홍류동 계곡에 있는 농산정(籠山亭)은 고운이 은거해 수도했다는 곳에 세워진 정자다. 후대 사람들이 고운을 기리기 위해 정자를 만들었다. 농산이란 정자의 이름은 고운의 시에서 따왔다. '바위골짝 치닫는 물 첩첩산골 뒤흔드니/ 사람 말은 지척에도 분간키 어려워라/ 세속의 시비 소리 행여나 들릴세라/ 흐르는 계곡물로 산 둘러치게 했나."

해인사 아래 마을인 치인리도 고운의 이름인 치원에서 유래했다. 치인리 서편에는 치인골이라는 골짜기가 있고, 그 끝자락에 고운암(孤雲庵)이 있다. 고운이 말년에 이곳에서 초막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그의 호를 따서 암자 이름을 지었다.

시대를 만나지 못해 그 큰뜻을 펴지 못하고 가야산에 은거한 고운. 그의 호처럼 당대에는 외롭고 따라주는 이가 없었지만 천년이 지나도록 그 명성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문집인 '계원필경'을 남겼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다. 신라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그의 생각과 사상은 최승로 등을 통해 고려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는 저 웅혼한 가야산처럼 고운은 후세인들에게 훌륭한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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