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님' 그 이름 속에는 고향의 전설이 스며있다. 우리 농어촌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장은 행정의 최일선이다. 이장은 주민의 대변인이다. 이장은 마을의 변천과 주민들의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지켜봐온 당산목이며, 이촌향도의 서러운 세월과 수입개방의 거센 파고를 묵묵히 감내해온 저문 이정표이다.
마을이 있고 주민이 있으면 산간오지 비탈길도, 한나절이나 걸리는 뱃길도, 등대불 희미한 해안길도 마다하지 않는 이장님. 막걸리잔에 어리는 이장님의 이야기는 고향의 고즈넉한 인정이면서도 가슴 저미는 풍경들을 대변하고 있다.
마을의 대서방이자 주민들의 사랑방인 이장님 댁을 찾아간다. 이장님의 삶을 통해 오늘 우리 농어촌이 안고 있는 적나라한 현실을 들여다본다.
안동호와 임하호 양 호수 사이에서 30년 넘게 지내온 마을 안동시 임동면 사월리. 1976년 댐 수몰민들이 뿔뿔이 고향을 떠나고 독가촌만 호수변에 듬성듬성 늘어서 있는 이 외로운 마을에도 봄기운이 어린다.
"어서 오이소. 아직 밖이 춥네!" 목련 꽃눈이 한껏 부풀어 오른 2일 오후 햇살 따스하게 모인 마당 한쪽에서 겨우내 세워둔 80cc 오토바이를 꺼내 손질하던 이장 황오복(73)씨는 불쑥 찾아 온 손님을 반겨 맞는다.
댐이 축조되기 전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낙동강 백사장에 달빛이 내려앉으면 눈부실 정도로 모래가 하얗게 빛을 낸다고 해서 붙은 마을 이름 '사월'(沙月), 즉 '모래달'이다. "어때요 마을을 둘러 보니… 5리에 한 집, 10리에 한 집씩. 좀 서글프지요?"
임하댐 속으로 사라진 옛 임동면소재지에서 5대를 내리 살아 온 터줏대감인 그는 4H 지도자, 산림조합 이사, 방위협의회 위원, 임동중 육성회장 등을 지낸 면내 유지였으나 노후에 조용히 살자는 생각에 30년 전 이곳으로 왔다.
임동면 토박이들의 모임인 '뿌리회' 회장을 지내기도 한 황 이장은 앉자마자 "촌사람 이야기 좀 들어보라"며 말문을 연다. 설핏하게 고쳐 쓴 모자 사이로 희끗희끗 비어져 나온 백발도 강과 호수와 더불어 살아온 풍상의 세월을 전한다.
성짓골과 금당리·중배이·세마을 등 안동 김씨 집성촌과 배티·윗배티·잔내이·보매골 등 안동 권씨 복야파들이 많이 사는 사월마을의 농가수는 모두 89호. 주민 수가 90여명으로 한 집에 한 사람씩 사는 꼴이니 인구밀도가 성기기 이를 데 없다.
안동댐 축조 이전에는 수몰된 안동군 월곡면에 편제돼 있었던 이 마을은 재 하나만 넘으면 임동면 소재지이지만 오지중의 오지다. 주민의 85%가 65세 이상 노인인 이 마을의 고령화는 수몰민이 마을을 떠나던 30년 전에 이미 시작됐다.
"아이구 말도 마이소. 밤만 되면 산짐승들이 난립니다." 마을 주변이 안동호와 임하호로 둘러쳐지면서 생태로가 끊긴 탓에 산돼지와 노루 고라니가 농작물에 입히는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산짐승과 주민들이 함께 산다고 표현하는 게 맘 편할 정도이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를 산짐승들이 대신 메운 것인가.
"한갓진 곳이지만 우리 마을엔 올해 101세인 시어머니를 모시고 혼자 사는 효부도 있어요." 서른에 남편을 잃고 혼자 8남매를 다 키워내고도 백수를 넘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중배이' 마을 만년 며느리 권태승(70) 할머니가 항상 걱정이다.
주민들이 모은 정성으로 겨우 토담 오두막집을 면했으나 1천여평의 산비탈밭에 의지해 어렵게 생계를 꾸리고 있기 때문이다. 촛불을 켜고 사는 '잔내이' 마을도 있다. 전기가 들어가지 않아 그 흔한 TV도 볼 수 없는 마을 주민 권영식(50)씨를 만날 때마다 죄라도 지은 양 계면쩍기만 하다.
동네 심부름꾼처럼 마을 일에 열심인 이웃의 3남매가 자꾸만 나이를 먹는데도 시집장가를 못 가는 것도 걱정이다. "이혼한 시동생이 맡긴 아기를 3년째 돌보고 있는 착한 며느리도 있어요." 농촌살이도 힘든데 아이까지 맡아 키우는 친구집 며느리가 너무 착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요새 시골에서 아이 우는 소리 들을 수 있나요." 어찌됐든 마을을 찾아 온 아기가 복덩이라, 방긋방긋 웃으며 재롱을 부리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아 오며가며 들여다보는 재미도 적잖다고 한다. 해가 저물도록 황 이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부인이 간고등어를 굽고 냉이국을 끓여 저녁상을 내온다.
"이젠 농사 욕심도 못내요." 몇년 전 대장암 수술로 몸이 예전같지 않다는 황 이장. 남의 땅을 합해 밭 9천917㎡(3천여평))에다 사과·고추·콩·채소를 심어 연소득이래야 1천여만원 정도. 5남매 중 맏딸(49)과 둘째딸(43)은 포항과 대구로 시집가서 잘 살고 있고, 큰아들(46)과 둘째아들(38)도 그럭저럭 살아 다행이다.
그런데 동갑내기로 평생을 함께해온 부인 김궁주씨가 녹내장에다 중풍까지 겹쳐 시력을 잃어가고 있어 근심이 크다. 또 혼자 사는 막내딸(40)도 애물단지다. 시내에서 옷가게를 하다 지난해 부도가 나버린 것. "이달 말쯤에는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살 작정입니다." 칠순이 넘은 이장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요즘 따라 늙어서 그런지 자꾸 옛날이 그립습니다. 이웃끼리 오순도순 모여 살던 그 시절이… 이젠 이장도 다른 사람이 맡아 줬으면 좋겠는데…." 산비탈 마을이라 비만 오면 개울이 넘쳐 길이 무너진다. 지난해 마을 하천정비사업으로 적잖은 예산이 배정됐지만 주민들의 의견충돌이 또 재연될까 벌써부터 조바심이다.
늦은 밤 맥주 3병을 다 비운 황 이장은 '뽀꿍(뻐꾹)새야 다시 돌아와 다오'라는 제목으로 편지를 썼다. 그 옛날 살기 좋았던 사월리를 찾아 혼자서 여행을 떠나는 것. 그때를 떠올리면서 그렇게 몇자라도 긁적이면, 떠난 사람들과 변해버린 산천이 꿈속에서나마 되돌아 오려나….
안동·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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