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권 책을 경운기에 싣고 전국일주에 나서다
서재환(52)씨는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청도마을에서 매실농사 짓고 염소와 닭 키우는 사람이다. 그가 27년 전 여름날 500권의 책으로 마을문고를 열었다. 좀처럼 책과 친해질 기회가 없는 시골 사람들을 위한 문고였다. 여기저기서 책을 사고 빌려서 마을문고를 열기는 했는데 독자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경운기 이동 도서관'이었다.
1987년부터 경운기 짐칸에 책꽂이를 얹어 만든 '경운기 도서관'을 끌고 이웃마을로 독자를 찾아다녔다. 행여 동네 사람들이 못들을까 싶어서 노래를 틀어놓고 다녔다. 어떤 사람은 도시에서나 보던 쓰레기차가 왔나싶어 내다보기도 했다.
도서관 없는 시골마을 아이들에게 '경운기 도서관'은 희망이었다. 탈탈탈 서씨의 경운기 소리와 음악소리가 들리면 집에서, 마을 한구석에서 놀던 아이들이 뛰어나와 그를 반겼다. 경운기 도서관에는 위인전도 있고, 삼중당 문고판도 있고, 소년동아 같은 책도 있었다.
시골에 아이들이 점점 줄어들었고, 서씨는 경운기를 진상 중·고등학교 앞으로 끌고 갔다. 독자가 도서관을 찾는 게 아니라, 도서관이 독자를 찾아다닌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에게 책을 빌려주었다. 근처에 살던 학생들 중에 경운기 도서관을 이용해보지 않은 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이 마을 저 마을, 학교를 찾아다니던 경운기 도서관은 10년 후 청도 마을에 '텃밭 도서관'으로 자리잡았다. 책만 읽는 곳이 아니라 마음껏 뛰어 놀고, 전통놀이도 즐기는 공간이 된 것이다.
◇ 경운기 짐칸에 책꽂이 얹고
인근 마을 아이들이 찾아와서 책 읽고 뛰어 놀던 텃밭도서관은 세월이 흐르면서 전국으로 알려졌다. 주말과 방학이면 도시의 아이들도 즐겨 찾는 공간이 됐다. 책을 읽고 자연 속에서 뛰어 놀고, 전통놀이와 공연도 즐기는 공간인 것이다. 하루 짜리 소풍을 나온 아이들도 있고, 부모와 함께 와서 하룻밤을 묵어 가는 아이들도 있다. 500권으로 시작한 책은 이제 1만 8천권으로 늘어났다. 평화롭고 아늑한 날들이었다.
농부이자 도서관 관장인 서재환씨는 올해 11월 녹슬고 구멍난 '경운기 도서관'에 페인트 칠을 했다. 한동안 쓰지 않았던 이 경운기를 끌고 먼길을 떠나야했기 때문이다. 그는 녹색과 청색으로 새로 칠한 경운기 도서관에 책 800권을 싣고 전국 일주 대장정에 올랐다.
11월 17일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을 출발해, 18일 순천, 19일 순례, 21일 임실, 22일 전주, 23일 금산, 24일 대전, 25일 청주, 26일 천안, 27일 평택, 28일 오산, 29일 수원, 30일 안산, 12월 1일 서울 홍익대 앞까지 국도로 500km가 넘는 거리를 탈탈탈 운전해갔다. 도착하는 곳마다 '경운기 이동 도서관'을 열고 책 교환행사를 펼쳤다. 독자들이 책을 가져오면 새 책을 바꿔 주는 방식이었다. 좋은 책을 나누기 위해 교환조건도 마련했다.
"자신은 읽지 않은 책, 버리고 싶은 책은 안 됩니다. 돈을 주고 사서 자신이 읽은 책이어야 합니다."
서재환씨는 버리고 싶은 책이 아니라 나누고 싶은 책을 나눈다고 했다. 2000년 이후 발행된 책에 한하며 헌 책 두 권을 내놓고 읽고 싶은 책 한 권을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책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도서관에 엄선된 책을 전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책을 구걸하거나 자선하자는 게 아닙니다. 좋은 책을 돌려가며 읽자는 것입니다. 책 한 권이 출판돼 30명의 독자를 거친 후에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이동도서관의 책 중에는 이른바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 수두룩했다. 광양에서 서울까지 경운기로 이동을 마친 그는 부산과 대구를 거쳐 트럭을 타고 광양으로 돌아갔다. 그가 이동한 거리는 1천 km에 이른다.
광양을 출발하기 전에 그는 책 800권을 경운기에 싣고 비용을 준비했을 뿐이다. 각 도시의 책 교환 행사장 확보와 홍보는 그의 카페 '오지게 사는 촌놈(http://cafe.daum.net/nongbuc)'의 전국 회원들이 릴레이로 맡았다. 전주에서는 전주회원이, 서울에서는 서울 회원이, 대구에서는 대구 회원들이 일을 도왔다.
◇ 아스팔트 위로 나온 경운기
평화로운 시골마을에서 '텃밭 도서관'을 운영하던 서재환씨가 '천리장정'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도서관 앞 야산에 폐타이어 소각로 제조공장을 들어선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4월부터 소각로 제조공장 반대 운동을 펼쳤습니다. 주민들과 문화예술인, 카페 동호인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공무원들은 법적 하자가 없어 막을 길이 없다고 합니다. 업자들은 도서관에 피해 없다며 강행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쉼터가 망가지는 것을 바라볼 수는 없었습니다."
서재환씨는 소각로 제조공장 저지를 위한 문화행사를 열고, 천막농성도 했다. 관청에 수없이 항의도 했다. 그럼에도 소용없었다. 11월 17일 국민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공장대체부지 기금마련을 위해 경운기 도서관을 끌고 대장정에 오른 것이다.
"촌놈의 이기주의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도서관 문화를 지킬 수 있다면 몸이 부서진들 두렵겠습니까?"
그는 사생결단의 자세를 취해 누군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아직 공장건설이 시작된 단계가 아니니 지금이라도 공장부지를 따로 마련하면 양쪽 모두 피해가 적지 않겠느냐고 했다. 관청과 사업주, 주민들과 자신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 해결책이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전라남도 광양의 산골마을에 자리잡은 '농부네 텃밭 도서관'. 관청이 주도한 도서관이 아니라 농사꾼이 만든 도서관이다. 공부하는 열람실이 아니라 책 읽는 공간이다. 거창한 시설은 없지만 아이들이 찾아와 전통 놀이와 공연을 즐기며 머무는 공간이다. '텃밭 도서관'은 작지만 커다란 문화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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