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승자와 패자의 신화

입력 2007-12-20 09:31:01

승자에게는 지난 일화들이 화려하게 부활한다. 나라를 이끌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없다. 갖가지 일화들이 얼개를 만들어 장중한 신화가 된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지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명박 신화는 다른 주인공들의 신화와는 질량에서 크게 다르다. 미화되지 않은 현실에 뿌리박고 있어 실감과 감동이 있다. 신화이기에 너무 현실적이어서 그의 신화는 신화로 남을 일이 아니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했다. 굶기를 밥먹듯 했고 납입금을 못내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영양실조로 쓰러져 몇 달간 일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고 비관하지도 않았다. 소년시절부터 뻥튀기.풀빵.김밥 등 닥치는 대로 길거리 좌판 장사를 하며 스스로 돈을 벌어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을 다녔다. 단과대 학생회장으로 6.3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도, 감옥에도 갔다. 그리고 현대건설 시대. 국회의원. 서울시장.... 혼자 하기엔 너무 많은 일들을 한 것 자체가 신화다.

그는 훌륭한 어머니를 두었다. 독실한 크리스찬인 그의 어머니는 가족기도 때 항상 남을 위해 먼저 기도했다고 한다. 나중에 가족들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남의 집에 가서도 얻어먹지 말고 얻어오지도 말라고 엄중한 자립심과 자존심을 지켜가게 가르쳤다고 한다. 아버지는 없어도 어머니만 훌륭하면 아이는 구김 없이 잘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명박 신화는 이미 잊혀지고 사라진 보릿고개의 처절한 고난을 웅변하고 있다. 그는 참담한 보릿고개를 죽지 않고 넘어 성공 가도를 질주했다. 많은 지도자들이 대부분 우회하거나 도움을 받아 넘어선 보릿고개를 그는 맨발로 뛰어 넘었다. 부황 든 몸으로 일하고 일해서 최고봉을 등정했다. 아마도 개천에서 용 난 신화의 마지막 주인공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신화는 신화가 아닌 현실로 남아 어려운 아이들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신화는 퇴색하기도 변색하기도 한다. 내일 아침 당장 아무것도 아니게 잔인하게 짓밟힐 수도 있다. 정치 풍토가 그렇다. 장삼이사 무수한 국민이 압도적으로 이명박을 민 것은 이명박의 신화가 살아남아 새로운 신화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응축돼 있다.

패자가 됐지만 정동영 후보도 언젠가 성공 신화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노무현대통령과 함께 DJ의 새천년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다. 명분은 전국정당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집권당으로써 옳은 방향이었다. 다만 대통령의 저급 정치로 인해 빛을 잃었을 뿐이다. 그는 대선 기간 내내 지역감정에 기대는 일은 하지 않았다. DJ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개표 결과 영호남 대립구도가 엄존 했지만 그의 책임은 아니다. 통일시대를 앞두고 그의 진정성이 평가받고 신화로 살아날 날이 있을 것이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대선 후보가 아니면서도 대선의 신화를 만들었다. 그는 치열한 당내 경선에서 석패한 후 아름답게 승복하고, 이회창 후보의 유혹과 이명박 후보의 의혹 가운데서 지도자의 정도를 지킴으로써 민주주의 신장이라는 값진 가치를 창출했다. 특히 어느 선거보다 국민이 외면당한 이번 대선에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굳게 확인시키는 큰 역할을 수행했다. 신화는 승자보다 패자에게서 만들어진다.

공교롭게도 대통령선거는 연말에 있다. 나이와 세월을 의식하고 따뜻함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그리고 돌아보는 계절이다. 정치 지도자들이 이젠 아집과 욕망에서 벗어나 겸허한 마음으로 돌아봐야 한다. 정치는 영일이 없고 정치판은 영원할지라도 정치생명은 유한하고, 정치인도 사람인 이상 죽는다. 승자도 패자도 아름다운 신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 과연 떳떳하고 따뜻하게 살았는지 되돌아보는 세모였으면 한다. 곧 새해가 오고, 다시 5년이 시작된다.

김재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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