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둑 or 얄팍?'…지갑으로 본 2007년

입력 2007-12-15 07:13:28

"2007년 당신의 지갑은 두툼해졌습니까? 얄퍅해졌습니까?"

얼마전 한국은행이 물가 등을 감안한 국민경제의 실질 구매력을 나타내는 실질국민소득(GNI)이 작년보다 성장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갈수록 '홀쭉해지는' 지갑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파르게 치솟는 기름값 등 물가는 들썩거리는 반면 수입은 제자리를 맴돌거나 되레 줄어 가정마다 경제 사정이 악화일로를 걷기 때문이다. 여기에 각종 세금이나 국민연금 등 뗄 것은 확실하게 떼어가 '유리지갑'이란 자조적인 푸념도 나오고 있다.

직장인, 자영업자, 취업준비생 등 3인의 지갑을 통해 2007년 한 해를 되돌아봤다. 세 명 모두 지갑이 얄팍해졌지만 지갑 안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 내일에 대한 희망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사진·정우용기자 vin@msnet.co.kr

♠ 직장인 민웅기 씨의 지갑

보험 세일즈맨으로 일한 지 올해로 7년째인 민웅기(43·프루덴셜 컨설팅 라이프 플래너) 씨. 그의 지갑에는 1만 원권 5장, 1천 원권 2장, 그리고 5천 원권 8장 등 9만 2천 원이 들어 있다. 5천 원권이 유달리 많은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다. "1만 원 지폐를 내면 돈을 헤프게 쓴다는 느낌을 받는 반면 5천 원짜리는 '마디게' 돈을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행사나 모임에서 회비를 낼 때도 5천 원짜리가 유용하지요. 또 설에 20여 명이 넘는 조카들에게 세뱃돈을 줄 때도 5천 원권이 쓸모가 있더군요."

몇 년 전까지는 지갑에 10만 원짜리 수표 2, 3장을 넣고 다녔지만 이젠 '옛이야기'가 됐다. "제 지갑에서 수표가 '실종'된 것이 신용카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30대 때엔 수표를 넣고 다니며 호기롭게 돈을 쓴 적도 있지만 40대가 되면서 가족(부인과 2녀1남)에 대한 책임감이 막중해져 돈을 함부로 쓸 수가 없더군요." 식당이나 술집에서 지갑에서 10만~20만 원을 꺼내 앞장서 계산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테니스 동호인, 학교 졸업 동기 모임 등은 물론 직장 선후배 간 모임에서도 돈을 똑같이 내는 '더치 페이'가 대세라는 것이다.

본인이 5년 전에 산 반지갑을 갖고 다니는 민 씨는 올해 지갑이 얇아졌다고 했다. 수입은 작년과 엇비슷한 반면 유류비나 애들 학원비 등 지출은 늘어 지갑이 홀쭉해졌다는 얘기다.

"40대에 접어든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겠지만 본인 스스로를 위한 지출보다는 가족에 대한 지출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하나 둘 늘어가는 반면 지갑은 얇아져 고민이 되지요." 운동을 하다 허리를 다쳐 쉽게 낫지 않는 것을 보고, 나이의 무게를 실감했다고도 했다. 부동산, 주식, 펀드 등에 조금씩 투자하고 있지만 2007년 성적표는 신통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40이 넘어 늦둥이를 낳은 민 씨는 자녀들이 커가는 것을 보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털어놨다. "퇴근을 하고 아이들의 재롱을 보고, 같이 놀아주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지만 가족들과 함께 여행하고, 여행 때 찍은 사진으로 같이 다이어리를 만드는 것도 재미가 있더군요." 지갑에 넣고 다니는 세살된 막내의 사진을 가끔씩 꺼내보며 스트레스를 떨쳐버리고 있다.

다가오는 새해엔 지갑이 두툼해지는 것은 물론 가족 모두의 건강이 민 씨의 소원이다. "아이들이 조금 더 철이 들고 지혜로워지기를 바랍니다. 땀흘려 성실하게 일하고, 고객들과의 약속을 꼭 지키다보면 제 지갑도 조금 더 두툼해질 것으로 믿습니다."

▶ 무엇이 들어있나?

1) 5천원권 지폐 8매='마디게' 돈을 쓸 수 있어서

2) 수표 실종=한턱 옛말. 이젠 더치페이가 대세

▶ 가장 소중한 것은?=세 살 막내사진. 보고있으면 스트레스가 싹 가신다.

▶ 올해엔?=훨씬 얇아졌다. 수입은 일정하고 아이들 학원비는 늘어서다.

▶ 새해엔?=성실하게 일하면 좀 더 두툼해질 것.

♠ 자영업자 이재하 씨의 지갑

20년째 슈퍼마켓을 경영하는 이재하(44·코사마트 봉산점) 씨의 지갑에는 꽤 많은(?) 돈이 들어 있다. 요즘 보기 힘들다는 10만 원짜리 수표가 5장, 1만 원권이 30장 등 80만 원이 지갑 안에서 나왔다.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에요. 물건을 떼오는 데 현금으로 지불해야 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많은 돈을 지갑에 넣고 다닙니다."

현금 외에 카드로 결제한 6개의 영수증들과 로또 복권도 보였다. "두 달치 정도 영수증을 모은 것 같아요. 애들 옷을 사주거나 기름값을 계산한 것이지요. 제 자신을 위해 쓴 것은 별로 없어요." 한 달에 1번 정도꼴로 구입하는 로또 복권은 그동안 번호 6개 중 4개를 맞춰 4만 원을 탄 것이 최고 성적이란다. "저희 같은 서민들이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복권을 사지요. 복권에 당첨된다면 아파트 대출금부터 갚을 생각입니다." 공중전화카드와 신용카드, 주유할인카드 등도 눈에 띄었다.

2007년 이 씨의 지갑도 얇아졌다. "최근 2, 3년 동안 장사가 하도 안돼 이제는 바닥에 도달했다고 믿었지요. 올해엔 작년보다 장사가 더 안돼 바닥 밑에 지하 1층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슈퍼마켓에서 많이 파는 담배 경우 예년에는 금연열풍이 부는 연초에 판매량이 줄었다가 회복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올해엔 시간이 지날수록 판매량이 감소했다는 것이다.

대구 중심지에서 장사를 하는 이 씨는 "슈퍼마켓은 물론 식당 등 자영업 모두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고 털어놨다. "1주일 가운데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금요일과 토요일에만 그나마 장사가 될 뿐 나머지 5일은 바닥을 긴다고 보면 틀림없어요. IMF 위기 이후 직장을 잃은 분들이 너도나도 창업을 하는 바람에 공급은 과잉된데다 경기가 나빠지다 보니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오전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1시까지 슈퍼마켓을 지켜야 하는 이 씨는 친구들과의 모임에도 자주 못나갈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다. "가끔씩 집사람과 소주 한 잔을 같이하며 얘기를 하는 게 즐거움이지요. 저희 같은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에겐 돈 쓸 시간이 없이 바쁘게 사는 것이 돈을 버는 셈이지요."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형제를 둔 이 씨는 "올해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지갑은 얇아졌지만 가족 모두가 건강한 것이 기쁨"이라고 했다. "슈퍼마켓이나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에겐 기업경제보다는 가정경제가 살아나는 것이 중요하지요. 일자리가 많아져 백수가 없어지고, 비정규직도 줄어 지갑에 돈이 있어야만 슈퍼마켓에 와서 음료수라도 하나 살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새해엔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지갑이 두툼해지기를 바랍니다."

▶ 무엇이 들어있나?

1) 카드결제 영수증 6매=나 자신을 위해 쓴 건 없다.

2) 로또복권=당첨되면 아파트 대출금 값을 것.

▶ 가장 소중한 것은?=수표 5매 등 80만원. 슈퍼마켓 물건 떼오기 위한 것.

▶ 올해엔?=얇아졌다. 작년에 경기 바닥. 올해 경기는 지하1층.

▶ 새해엔?=모든 사람들의 지갑이 두툼해져야 장사 잘될 것.

♠ 취업준비생 ㄱ씨의 지갑

올 2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위해 애쓰고 있는 ㄱ씨(22·여). 그녀의 지갑에는 현금 6만 4천 원이 들어 있다. 6개월 동안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직장을 구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는 것. 직불카드와 학생증, 도서관출입증으로 다 통용되는 카드가 들어 있는 것도 눈에 들어온다.

"졸업을 했지만 오전 10시쯤 도서관에 나와 오후 늦게까지 영어공부 등을 하고 있어요. 취업이 어렵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꼭 성공할 것으로 믿어요." 영화관과 외식업체, 백화점 등의 할인카드와 각종 쿠폰들도 지갑에 빼곡하게 꽂혀 있다.

ㄱ씨가 목표하는 직장은 은행과 공무원. "남학생보다 여학생들은 취업을 하기가 더욱 힘이 들어요. 같이 졸업한 친구 80여 명 가운데 취업을 한 친구들은 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예요. 직장을 구했다고 하면 친구들 사이에 화제가 될 만큼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3학년 2학기부터 취업을 위해 공부를 시작한 그녀는 많은 대학생들이 취업을 위해 졸업을 늦출 정도로 취업난이 심각하다고 했다. "취업에 성공한 선배들이나 친구들을 보면 편차가 너무 큰 것 같아요. 성적이나 실력은 비슷한대도 연봉이 5천만 원에 이르는 직장을 구한 경우가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직장을 구한 경우도 있어요.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도 많이 좌우하는 것 같아요."

올해 비록 취업을 못했지만 ㄱ씨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아쉬운 마음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2008년 상반기엔 꼭 직장을 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부모님이 겉으로 말씀은 하지 않으시지만 걱정하시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 마음을 알고, 저도 빨리 취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새 해엔 취업에 성공, 월급으로 받은 돈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다. "경제가 좋아지고 일자리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저도 2008년엔 어엿한 직장인이 돼 열심히 일하고 싶어요."

지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ㄱ씨는 초등학교 때 만난 동네친구가 몇 년전 만들어준 것이라며 코팅을 한 종이를 보여줬다. 거기엔 이해인 수녀의 '어느 벗에게'란 시가 적혀 있다. '삶이 통 재미없어/죽고 싶다고 푸념하는 그대// 사람들이 보기 싫어/ 무인도에라도 가고싶다는 그대/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그말/ 조금은 무책임한 습관적 표현이지요/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떠나고나면/ 사람들이 다시 그리워질꺼에요// 복잡한 시장터에도 가고싶고/ 만원버스나 전철을 타고 싶을거에요/ 고약한 냄새조차 향기로 느껴질걸요/ 그러니 삶의 미운정도 잘 가꾸며/ 씩씩하게 살아갈 궁리를 해보세요/ 그러면 환한 문이 열릴거에요/ 나팔꽃처럼 웃게 될거예요.'

▶ 무엇이 들어있나?

1) 학생증, 도서관출입증 겸용 카드=오전10시~밤까지 도서관에서 공부.

2) 각종 할인카드와 할인쿠폰

3) 현금 6만4천원=6개월 계약직 일해 일부 벌었다.

▶ 가장 소중한 것은?=친구가 선물한 이해인 수녀 시(코팅).

▶ 올해엔?=나름대로 열심이었다. 취업 못해 얄팍.

▶ 새해엔?=취업성공해 월급을 지갑에 넣고 다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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