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진도 그 섬에 가다

입력 2007-11-29 11:56:28

호국의지 드높은 남도 예술의 메카

서남해의 끝자락. 뭍이 그리운 섬과 섬이 못내 아쉬운 뭍이 연륙교를 통해 만나는 땅이 진도(珍島)다.

조선 왕조 때 진도는 천험의 유배지였다. 진도대교가 없다면 한 번 섬에 들면 웬만해서는 뭍으로 나올 엄두가 나질 않을 것 같다.

섬의 초입, 한 눈에 봐도 소용돌이치며 용솟음치는 물길은 배가 거스르기 힘들 듯 하다. 해남과 통하는 이 좁은 바닷길은 이 충무공이 12척의 조선수군 판옥선을 이끌고 330여척의 왜선을 무찌른 명량대첩지로 유명한 울돌목이다.

시간을 거슬러 고려 때는 배중손이 이끈 삼별초가 마지막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 또한 진도다.

역사의 질곡을 잠시 뒤로 미루고도 진도가 세인의 이목을 모으는 까닭은 200여 년간 예술의 향기가 끊이지 않은 운림산방(雲林山房·전남 기념물 51호)이 있기 때문이다.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이 스승이었던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뜨자 말년에 이 곳에 칩거, 문기가 드높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전통 남도의 화맥을 이어온 남종화의 산실이다.

남종화는 건필(乾筆)을 이용한 갈라진 붓놀림, 수묵의 대담한 농담(濃淡)이 특징이다. 소치의 숨결이 숨쉬는 유서 깊은 운림산방 내 세워진 그의 기념관에 들면 2대 미산 허형, 3대 남농 허건과 임인 허림 형제, 4대 임전 허문 등의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이들 허씨 일가의 찬란한 화풍이 있어 진도는 '남도 제일의 문화공간'임을 자임한다.

차가 달린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벌교, 보성, 강진, 해남을 거치면서 이젠 슬슬 지겨울 즈음, 땅과 섬 양쪽에 높이 세운 버팀 기둥에 비스듬히 드리운 쇠줄로 다리를 지탱한 사장교(주로 물의 흐름이 빠르고 수심이 깊은 곳에 놓음)가 보인다. 어깨를 나란히 한 제1, 제2 진도대교다.

그 다리 아래로 거친 바다가 출렁인다. '소리 내어 우는 바다 길목'이란 뜻의 순 우리말 '울돌목'이다. 소용돌이 쳤다가 솟아오르며 세차게 흘러내리는 물길이 해협을 뒤흔든다.

폭 325m, 수심 20여m, 유속 24km의 급류. 하루 4차례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며 그 사이 2번은 잠시 조용해지는 바다길.

해남군 우수영기념공원과 맞은 편 진도 녹진 전망대 아래 강강술래 터가 바라다 보인다. 400여 년 전 민과 군이 긴 국난을 이겨냈던 든든한 호국의 현장, 남도의 고운 낙조가 그 바다 위를 비춘다.

◆구름 숲은 묵향의 그늘을 드리우고

소치(小痴) 허련(許鍊)의 거처였던 운림산방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첨찰산 자락이 부드럽게 내려 깔리는 산중의 볕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아직은 겨울이 먼 듯 남도의 늦가을 풍경에 운치가 두드러져 그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다.

산방 앞 작은 연못엔 수련이 피어있고 물 가운데 작은 인공 섬엔 배롱나무(백일홍) 한 그루가 심겨져 있다. 얼핏 봐도 수령이 오래된 듯 수형이 빼어나다. 연못은 영화 '스캔들'의 촬영지로 앵글조작에 의한 영화 속 화면처럼 넓진 않지만 아담한 풍치가 인상적이다.

산방은 ㄷ자형의 5칸 작은 기와집은 단출했으나 이곳에서 소치는 시·서·화 삼절의 문인산수화의 품격을 완성한다.

구름 숲이 묵향을 드리우는 운림산방 당호 밑 툇마루에 앉아 연못전경을 훑자 담청과 담홍의 가을빛이 완연하다. 산방 뜰 앞 파초와 담장 대나무 숲의 일렁임도 그림의 소재가 됐으리라. 산방 뒤엔 딸린 두 채의 초가집 방안엔 고가구가 가지런하고 마당엔 절구가 그림 속 소품처럼 있고 그 옆을 넓은 파초 잎이 햇살을 받고 있다.

고절한 예인의 기질을 닮은 산방을 둘러보고 잔디가 깔린 오솔길을 따라 가면 소치기념관이다. 입구에 양천 허씨의 가계도와 허련을 시작으로 종손격인 현재의 허문까지 4대에 걸친 50여 작품이 전시돼 있어 남종화의 화풍을 읽을 수 있다.

소치의 전형적인 화풍을 엿볼 수 있는 부채그림인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 한 폭.

피마준법(마라는 천의 올이 흐트러지듯 부드럽게 그린 화풍)을 소화한 윤갈(필획이 윤택하거나 마른 느낌)의 수묵화로 담홍과 담청의 색을 이용해 운림산방의 여름 저녁 풍경을 표현함으로써 독특한 격조를 보여준다.

막내아들인 미산 허형의 '추강조어(秋江釣魚)'는 아버지의 화풍을 계승해 먹의 농담과 여백미로 가을 강물결의 잔잔함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채 봄이 오기 전에 꽃을 피운 고절한 '매화도'는 그림 속 꽃과 가지 사이에서 차가운 잔설이 날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색조가 두드러진 남농 허건의 작품은 어지러운 붓터치와 여백로만 표현한 '계산유곡(溪山幽谷)'과 바람에 쏠리는 갈대의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추강조어'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운 산수화의 경지를 담고 있다.

특히 안개화가로 불리며 허문(현재 목포에서 활동)의 작품은 사물의 형태를 먹의 강약으로 표현, 화면이 살아 움직이듯 전환시켜 여백마저 그림의 일부로 승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양천 허씨들은 빗자루 몽둥이만 들어도 명필, 명화가 나온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운림산방 내 진도역사관도 빼놓을 수 없다. 선사시대의 진도 유물과 생활상, 삼별초의 용장산성 전투 모형, 명량대첩 때 쓴 조선수군의 무기들이 진열돼 있다. 운림산방에선 매주 토요일 오전11시 '남도예술은행 토요 경매'도 연다.

◆또 다른 고려왕조를 꿈꾸다

강화도에서 대몽항전을 벌이던 고려왕조(원종)는 마침내 몽고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개경환도를 단행한다. 그러나 삼별초와 배중손은 이에 굴하지 않고 진도로 남하, 왕족인 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이곳에서 성곽을 쌓고 행궁터를 지어 대몽항쟁의 기치를 올린다.

그 역사의 현장이 용장산성(축성 당시 둘레 약13km 높이 4m)이다. 지금은 산성의 일부와 행궁터만 남아 있다. 제대로 된 형태를 띤 것은 성내에 지었던 용장사 뿐. 절의 대웅전 석불좌상은 산성을 쌓을 때 국난극복의 기원으로 조성한 석불인 듯한데 결가부좌한 하체가 상체보다 큰 고려불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불상의 좌우엔 일광보살, 월광보살이 선 채로 보좌하고 있다.

◆서남해안 일몰의 장관이 고스란히

수평선 저 멀리 구름에 반쯤 가려진 붉은 구슬이 걸리면 바다는 온통 진홍빛으로 물이 든다. 낮과 밤의 경계를 짓는 낙조의 황홀한 연출력이 몽환적 풍경을 그려내고 수평선 위 푸른 하늘은 서서히 어둠 속에 밀려난다.

진도 해안도로 중 가장 아름답다는 세방낙조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다도해 경관과 해질 무렵 섬과 섬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일몰은 진도 여행의 압권이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사진·정재호 편집위원 newj@msnet.co.kr

▩진도 가는 길=구마고속도로 칠원 분기점에서 남해고속도로를 탄다. 남해고속도로 순천 IC에서 빠져나와 순천시를 통과, 벌교와 보성방향 2번 국도로 접어든다. 2번 국도는 왕복 4차선의 준 고속도로로서 이 길을 따라 벌교, 보성, 장흥, 강진, 해남까지 이어진다.

해남에서 다시 2차선의 13번과 18번 국도를 번갈아 갈아타서 1시간여를 가면 진도대교가 나타난다. 대구에서 자동차로 가면 얼추 6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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