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고 낙엽이 흩날린다. 때론 새벽 유리창에 성에가 끼기도 한다. 따뜻한 온기가 그리운 계절이다. 문득 옛적, 우리 집에서 제일 따뜻한 곳이 어디였을까? 아랫목? 아니, 그 보다 더 따뜻한 곳은 아궁이였다. 아랫목의 추억보다 더 따뜻한 아궁이. 불이 생겨나던 아궁이의 추억으로 늦가을의 찬 기운을 이겨보자.
할머니는 늘 아궁이에서 일어날 때면 "아이구, 이놈의 다리야!"하며 아픈 무릎 관절과 저린 다리를 펼치셨다. 할머니가 한참을 절룩거리며 부엌문을 나서면 내 마음엔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아궁이 속의 불을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호시탐탐 노리던 아궁이속의 불이다. 처음엔 호기심삼아 불 지피기를 해보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장난기가 발동한다. 불붙은 나무꼬챙이를 꺼내 훅 불어보기도 하고 빙글빙글 돌려보기도 한다. 불장난이 시작된다. 아마 요즘 아이들의 게임처럼 시간가는 줄 모르던 불놀이였다.
부엌에서 할머니가 퇴장한 뒤, 얼마쯤 지났을까 어머니가 등장하면, 으레 한 소리를 듣게 된다. "이놈아, 사내 대장부가 부엌 들락거리면 고추 떨어져"라며 아궁이 앞에 앉은 나를 밖으로 쫓아낸다. 어머니의 꾸지람 와중에도 불 꼬챙이 하나는 갖고 부엌문을 나서야 직성이 풀렸다.
어머니의 꾸지람이 아직 내게 생생한 말로 남아 있다면 할머니의 말씀 역시 또렷이 남아있다. "불은 무서운 짐승과도 같어. 잘 다루면 가축으로 쓰이지만 잘 못 다루면 우리를 잡아묵는 짐승이 되는 기라" 면서 불을 잘 다뤄야 한다면서 불씨 다루는 방법을 일러주셨다.
불을 지필 때는 지푸라기나 산에서 해 온 마른 소나무 잎(갈비)을 먼저 깔아 불을 지피고 숨구멍이 잘 생기게 나뭇가지를 서로 엇갈리게 얹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불꽃이 일어 불이 확 피었을 때 굵은 장작개비를 넣어야 했다. 불을 지피면서 한 가지 주의 할 점은 불이 아궁이 밖으로 나오지 않게 땔감을 깊숙이 밀어 넣어야 한다. 또 잔불이 안 나게 아궁이 입구를 깨끗하게 치우면서 불을 지펴야 한다는 노하우도 배웠다.
훗날 어른이 되어 아궁이에 불 지필 일은 없어졌다. 다만 한 번씩 잘사는 동무의 별장 같은 곳엘 가서 벽난로에 불을 지펴 호일에다 고구마 구워먹을 때 말고는 그 노하우를 써 먹을 일이 없어지고 말았다.
아궁이는 아이들을 끌어 모으는 장소였다. 집집마다 갖고 온 고구마,감자,옥수수,밤 나부랭이와 같은 주전부리들을 구워먹던 밀회의 장소였다. 어른들 눈치 보며 아궁이 앞에 펼쳐 놓은 주전부리들을 구워 먹다 보면 어느새 입은 새까만 까마귀가 되어 있었다. 주전부리를 구워먹을 때도 역시 노하우가 있어야 했다. 옥수수는 껍질을 벗기지 않고 약한 불에 묻어야 하고, 밤은 껍질을 조금 까서 묻어야 뜻하지 않은 폭발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도 그 때 배웠다.
저녁 어름이던가? 한번은 친구 집 아궁이에서 몇 녀석이 장작개비로 불을 들쑤시면서 논적이 있었다. 문득 장작 패던 쇠자루가 달린 도끼를 아궁이에 집어넣고 쇠자루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 나머지 실험 같지도 않은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아궁이의 벌건 불에 쇠자루를 넣고 얼마쯤 지났을까 쇠자루가 벌겋게 달아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괜히 겁이 난 나머지 슬그머니 도끼를 끄집어내곤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이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 일이 있은 후, 그 쇠도끼가 없어져서 친구 녀석의 집에 비상이 걸렸다. 그 때 당시 아궁이 앞에 있었던 조무래기들이 모두 불려가서 친구의 아버지에게 취조를 당해야만 했다. 친구의 아버지는 누군가가 그 쇠도끼로 엿을 바꿔먹었다는 범행을 추측했다. 저녁 내내 어르고 협박하는 등의 취조가 이뤄졌지만 심증은 가도 물증이 없어 결국 그 쇠도끼사건은 미제사건으로 아직까지 남게 되었다.
수만이 아버님, 이젠 공소시효가 지나 누군가가 자백을 해도 될 법한데 아직 자백이 없네요. 지하에서라도 그 쇠도낄랑은 잊어버리고 편히 쉬세요. 언젠가 범인(?)이 잡히면 그 놈을 우리가 압송해서 아버님 묘소에 가서 소주 한잔으로 용서를 빌랍니다.
옛날 부엌체험은 팜스테이마을 등에서 체험이 가능하다. 만일 옛날 부엌용품과 같은 도구 관련 전시품을 보려면 달서구의 월곡역사박물관이나 경북 의성 교촌농촌체험학교 등에서 산에 지게를 지고 땔감을 구해 장작을 패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 밥을 해먹는 체험이 가능하다. (054-861-0923)
계란에 한쪽 구멍을 뚫고 속을 비워 쌀을 한 숟가락 넣고 물을 부어 굵은 소금 몇 알로 간을 하여 숯불에 울리면 금방 물이 보글보글 끓으면서 밥이 만들어진다. 껍질 밖으로 밥알이 솟아오르면 꺼내서 껍질을 벗기면서 먹는 뜨겁고 고소한 계란밥을 해먹어보자.
행복지수만큼은 100%였던 그 옛날이 그리워진다.
김경호(아이눈체험교육원장)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
'어대명' 굳힐까, 발목 잡힐까…5월 1일 이재명 '운명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