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시절,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면 나를 반기는 게 있었다. 엄마가 깨끗이 씻어놓은 붉디붉은 사과 몇 알. 따사한 가을 햇살이 쏟아지는 방에 누워서 책을 읽으며 내 주먹보다 조금 더 굵은 그놈들을 통째로 씹어 먹는 맛은 참 좋았다. 홍옥, 국광 뭐 그런 품종이었을 것이다. 요즘은 잘 안 보인다, 더 달고 큰 품종들에게 밀리나 보다.
어린 나와 친구했던 것처럼 사과는 아주 옛날부터 사람과 함께해 왔다. 스위스 호수 밑바닥에서 발견된 석기시대 유적지에서 새까맣게 탄 야생사과가 나왔으니 석기시대 조상님들도 사과를 즐기셨다는 얘기다.
사과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과일이기도 하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의 사과, 헤라클레스의 황금사과, 백설공주의 독사과, 빌헬름 텔의 사과, 뉴턴의 사과, 매킨토시의 사과, 세잔의 사과, 오지호의 사과밭, '조니 애플시드' 존 채프먼의 사과씨….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사과나무다. 물론 가장 유명한 사과는 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이겠지만.
우리나라에선 고려시대 때부터 사과나무를 길렀다. 그때 중국에서 들어온 종류가 능금이다. 지금 우리가 먹는 사과는 1884년 처음 심었으며, 과수원을 조성해 심은 것은 1901년이라고 한다.
국내에서 키우는 사과는 30종이 조금 안 되고 주로 키우는 건 10종 정도다. 1960, 70년대에는 홍옥과 국광이 대부분이었고 최근에는 후지(富士)나 쓰가루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홍옥, 국광은 원래 유럽 품종인데 미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왔으니 지구를 한 바퀴 돈 셈이다.
"하루에 사과 한 알이면 의사가 울고 간다."는 서양속담처럼 사과에는 '과일의 왕'이란 별칭에 어울릴 만큼 각종 영양이 풍부하다.
섬유소, 철분, 피로 회복에 좋은 유기산, 요즘 뜨고 있는 폴리페놀…. 전립선에도 좋고, 특히 케르세틴이라는 항산화물질이 뇌세포를 파괴하는 코르티졸을 크게 줄여줘 뇌세포 파괴 방지에 탁월하다.
이런 영양분들은 과육보다 껍질에, 연한 색 사과보다 붉은 사과에 더 많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어릴 때 알고 껍질째 먹은 건 아니었고 깎기 귀찮아서 그냥 먹었던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사과는 경제적이기도 했다. 사과나무 한 그루는 소 한 마리에 비견됐다. 사과나무 한 그루에서 열리는 사과를 팔면 아이 하나 공부시키기에 충분했다는 거다.
그 사과가 지금 큰 어려움에 처했다. 지난여름 쏟아진 우박 때문이다. 5월, 6월, 7월 세 차례나 거듭된 우박은 경북 북부지역의 사과 과수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피해 면적은 전체의 30%가 넘는다. 우박이 얼마나 심했으면, 최근 5년간 평균 피해 규모의 무려 27배에 달하는 피해가 올해 터졌다.
우박 맞은 사과를 사 먹자. 늦가을부터 많이 먹는 후지다. 가을 사과의 대표선수인 만큼 빛깔 좋은 선홍색에 단맛이 넘친다.
가격도 착하다. 굵은 놈들로 30개 이상 채운 상자가 택배비까지 해서 2만 3천 원, 좀 작은 것들로 개수 많이 넣은 박스는 2만 원, 1만 8천 원이다.
다음주부터 본격적으로 시장에 나온다. 우박을 맞은 사과는 모두 7만 4천t이나 되는데 피해 정도가 심한 건 주스 가공용으로 보냈고 시장에 나오는 것은 아주 엄선한 놈들이니 품질이나 맛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다. 워낙 피해가 커서 양은 충분하니 없어서 못 사먹을까 하는 것도 기우지만 서둘러서 손해 볼 것도 없겠다.
우박 피해 사과의 이름은 예쁘게도 '보조개 사과'다. 하늘이 만들어준 보조개다. 보조개 사과를 사 먹으면 우리는 건강을 얻고, 농민들은 웃음을 얻는다. 우리 모두한테는 신뢰가 생긴다. 그 신뢰는 우리 농촌을 되살릴 거름이 될 것이고, 생기 넘치는 농촌은 우리 모두의 생명창고가 될 것이다.
이상훈 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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