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단상] 茶가 있는 가을

입력 2007-11-08 17:04:56

가을의 군상(群像)들을 봅니다. 정갈하게 드러누워 가을하늘과 마주한 은행잎, 심술쟁이 바람, 자라목이 되어 옷깃을 여미는 행인, 쇼 윈도우 안쪽에 진열된 넋 나간 주인,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플라타너스 잎사귀, 간간히 들리는 신경질적인 자동차 경적소리.

스산함이 깊숙이 파고드는 이런 늦가을 날에는 차 한 잔이 절실해집니다. 공허한 마음 감추려 허세도 부려보지만 허공에 둔 시선에는 초점이 없습니다. 마음 추스르는 데는 차만한 친구가 없습니다. 허겁지겁 물을 끓입니다. 찻물조차 길어올 여유가 없어 정수기물로 대신합니다. 차 도구들을 하나씩 꺼내 펼칩니다. 찻잔을 데우고 차 우려낼 준비를 합니다. 차 마시는 것을 도(道)라 한 선인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차 공부를 시작한 때가 생각납니다. 중국 베이징 서부역 남쪽에 마렌따오라는 거리가 있습니다. 중국차의 모든 것이 있는 곳입니다. 어느 날 중국생활 베테랑 선배 한분이 단골집을 인수인계하시겠다고 불렀습니다. "워더 하오펑요(我的好朋友)" 딱 한마디의 소개말이 전부였습니다. 나올 때까지 묵묵히 차만 마셨습니다. 일어설 무렵 오랜 친구에게서나 느끼는 끈끈함에 젖어있는 나를 보았습니다. 차는 차로 사귀어야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차는 사람을 닮았습니다. 신선할수록 좋은 차와 오래될수록 좋은 차가 있습니다. 녹차와 철관음은 당년의 것이라야 고운 비취빛이 나고 맛도 구수합니다. 보이차는 오래 묵을수록 부드럽고 색깔도 곱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사귐을 달리하고 만나는 때와 장소를 구별하듯 차도 그렇습니다. 마음이 가벼울 때는 용정차가 좋고, 깊은 생각을 할 때는 보이차가 좋습니다.

차가 사람과 닮은 또 다른 이유는 물입니다. 물 맛이 좋으면 차 맛은 배가 됩니다. 제대로 된 차 맛을 음미하려면 깊은 산속에서 갓 떠온 천연수가 좋습니다. 물만 마셔도 맛이 있는 그런 물로 차를 우려야 제 맛이 납니다. 차의 속성이 잡냄새를 흡수하기 때문에 물맛이 잡맛이면 차 맛과 상쇄되어 차 맛은 그야말로 맹물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렇듯 차도 좋은 물을 만나야 합니다.

차 한 잔의 작은 행복을 놓칠세라 장문(掌紋)이 찍히도록 찻잔을 감싸 쥡니다. 따끈한 온기가 가슴에서 정수리로 그리고 모공 구석구석을 파고듭니다. 일순간 차가 되어버린 나를 느낍니다.

이정태(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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