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광장] 명산에 대한 추억

입력 2007-11-06 09:16:24

고향마을 집 앞 느티나무 아래에 서서 북쪽을 바라보면 소쿠리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는 산줄기가 모이는 중앙에 높지는 않지만 의젓하게 솟아있는 산이 있다. 산 정상 문턱에는 신라시대 창건되었다고 하는 연화사가 있고, 그 절 밑에는 맑은 물이 나는 샘이 있다.

3개 面(면)에 펼쳐진 산줄기들이 산 정상에 모여서 그런지 고향 사람들은 이 산을 신령스럽게 생각하고, 외지인들에게 자랑했다. 이 산 일대 초·중학교의 교가에는 어김없이 이 산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

특히 고향마을에서 바라보는 산의 모양이 가장 아름다운지라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항상 이 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으니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필자의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들도 어린 필자에게 수시로 이 산이 명산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필자는 어릴 때 이 산을 신비스러운 산으로 여겼고, 그곳에는 무엇인가 특별한 풍경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산은 그때까지 경험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것들을 담고 있을 것 같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명산에 대한 동경심은 이어졌고, 친구들끼리 등·하굣길에는 언젠가 10여 리 떨어진 그 산에 가보자는 약속을 하곤 했다.

그러면서 초등학교 6년 동안 명산의 씩씩한 기상을 담은 교가를 부르면서 방학 때마다 도시에서 놀러온 아이들에게 그 산을 자랑하곤 했다. 그렇지만 어린이들이 정작 10여 리를 걸어가서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한참 흐른 20세 때 마을에서 산줄기를 타고 4시간 만에 그 산위에 올랐다. 어린 시절 그렸던 그 산에 대한 풍경은 상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이 설레고, 살짝 긴장되었다. 어린 시절 내 마음의 한쪽을 지배했던 명산에 대한 감정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산 정상을 오르고, 절을 둘러보는 동안 필자는 어린 시절 품었던 생각을 추억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느 산과 다름없는 풍경, 고풍스러운 절이 아니라 퇴락한 본채 안에 최근 들여놓은 작은 불상, 시멘트로 덮은 샘….

미리 예상했었기에 혼자 얕은 웃음을 짓고는 어린 시절 상상속의 명산을 가슴에 담았다. 그리고 샘물을 한 사발 마시고, 찬찬히 둘러보았다. 산 정상에서 사방으로 산줄기와 들이 시원하게 펼쳐져 한참 동안을 바라보았다. 산 정상의 전망만큼은 일품이었다.

지금도 가끔씩 어린 시절 명산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한다. 소백산맥 산줄기가 지나가는 고향마을 일대에 수많은 봉우리들 중 하나인 그 산이 어린이들에게 꿈을 주고, 고향 사람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주었다. 그 산은 고향 사람들의 큰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명산을 가졌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필자는 늘 뿌듯했다.

아직도 고향 사람들은 명산 위에 있는 그 절 덕분으로 무탈하게 살아감을 감사하며 때가 되면 기도를 올리고, 연등을 단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도 가끔씩 모여서 그 산을 이야기하고, 고향에 들를 때면 때때로 그 산을 오른다고 한다. 평범했지만 모두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산으로 믿고, 그 믿음을 아래로 이어주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꿈을 가질 수 있었고,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높은 시멘트 빌딩, 아스팔트 도로, 그 위의 수많은 차량행렬, 덮여진 하천을 보면서 자라는 아이들도 필자와 같은 추억을 가질 수 있을까? 그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으로 내몰리고,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기보다 어린시절 꿈을 많이 품고,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되도록이면 대대로 이어지고, 이웃들과도 나눌 수 있는 명산과 같은 꿈이 이 도시에서 많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그 꿈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이웃들이 그 꿈과 연결되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남호진(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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