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실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역시 멀었다. 경상도에서도 가장 변두리인 영양. 영양 들어가는 입구쯤에 있는 관광농원에서 하룻밤을 묵고 서둘러 주실마을을 찾았다. 관광농원 옥상에서 이루어졌던 문학의 밤 행사도 무척 기억에 남는다. 영양은 정말 공기가 좋다. 도시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소박한 시골길. 이렇게 맑은 곳에서 이름난 문인이 태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실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안으로 버스가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조용한 시골 마을에 실례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시골길을 걷는 것도 나름대로 흥취가 있을 것 같아 마을 입구에 버스를 세우고 걸어서 들어갔다. 주실마을이라는 표지판을 지나 제법 긴 시골길을 걸었다. 길 가에 수없이 피어난 들꽃들, 이제 완전히 짙어진 볏잎의 흔들림. 그건 다름 아닌 고향 냄새였다. 다소 실망스러웠던 것은 조용한 시골길을 연상했지만 곳곳에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파헤쳐진 흙더미가 신발에 달라붙었다. 문화마을로 지정되어 현재 공사 중이라는 말이 들렸다.
마을 안은 고요하다. 먼데서 찾아간 이방인의 소리만이 마을을 채웠다. 우선 마을의 이장님을 찾았다. 늘 방문자들을 위해 안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다른 답사자들이 자주 만난 적이 있다는 조동걸 할아버지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옛날 선비의 풍모가 저절로 느껴지는 발걸음을 따라 지훈의 집으로 갔다. 대문 옆에는 '호은종택(壺隱宗宅)'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었다. 지훈의 생가는 보통 집이 아니라 종택(宗宅)이다. 호은(壺隱)은 주실 조씨(趙氏)들의 시조이자, 1629년(인조7년) 주실에 처음 들어와 이 동네를 일군 사람의 호이다. 집 주위는 온통 접시꽃이다. 대문을 들어서자 네모로 지어진 집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집 구조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종갓집의 풍모가 그대로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아이들과 함께 마루에 걸터앉아서 조동걸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명한 '삼불차(三不借)'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삼불차'는 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세 가지는 재물과, 사람, 그리고 문장이다. 사실 알고 보면 '삼불차'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말고 살자는 정신이다. 거기에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는 자신감도 내포되어 있다. 자신감은 자존심이기도 하다. 이어서 문필봉 이야기, 박사가 14명이나 배출되었다는 이야기, 지훈의 할아버지인 조인석이 6·25동란 중에 좌익의 횡포를 이기지 못해 자살한 이야기, 아버지 조헌영의 납북 이야기, 지훈의 형제들 이야기, 지훈의 사소한 가정 이야기, 지훈의 독특한 성향 이야기 등 2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70이 넘은 할아버지의 대단한 기억력과 열의에 놀라고 주실마을과 조씨 문중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깊게 느낀 소중한 시간이었다.
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문필봉에는 뭉게구름 한 자락이 접시꽃 송이와 함께 절묘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평생을 꼿꼿하게 지조를 지키며 살았던 지훈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이들과 함께 '지조론'을 읽었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조지훈 부분)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고 살아가려했던 지훈의 촛불은 바로 '지조(志操)'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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