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아지른 바위에 기댄 사성암

입력 2007-10-25 16:52:26

사성암 가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 '백제천년고찰 사성암'이란 표시가 없다면 초행자는 그냥 지날 칠 수도 있는 산길이 사성암 오르는 길이다. 밑에선 아예 절이 보이지도 않는다. 지리산 줄기와 닿은 오산(獒山) 봉우리에 있기에 숲에 가려져 있다. 이 때문에 걷는 건 고사하고 굴곡이 심한 산길을 차로 20여분을 조심스레 올라야 겨우 절 입구에 당도한다.

절이래야 화려한 일주문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낡은 대나무로 엮은 사립문이 속과 승을 구분 짓고 있다. 여기서 차를 두고 또 100여m를 돌아들어야 하는 작은 암자이지만 멋스러움만큼은 여느 사찰에 뒤지지 않는다.

백제 성왕 22년(544년)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원래 오산암이던 절 이름도 4명의 고승, 즉 연기조사, 원효대사, 도선국사, 진각국사가 참선 수도한 곳이어서 사성암(四聖庵)이 됐다.

◆절벽과 하나 된 탑 형상의 약사전

사성암 약사전을 보면 '아니 저런 곳에 법당이 있다니. 어떻게 저런 곳에 법당을 지었을까.'하는 의구심을 감출 수가 없다. 높은 기둥과 축대 위에 전각을 세운 약사전은 절벽에 걸려 있는 형상이다. 얼핏 보면 전각이 절벽을 뚫고 나온 듯하다. 눈을 돌려 왼편을 보면 커다란 반석위에 얹힌 듯 지장전이 있고 그 사이에 갈라진 바위를 초석으로 한 선방이 하나 걸쳐져 있다.

각 전각은 마치 바위에 박혀 있는 착각이 들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전체 암자가 오산의 기암절벽과 하나가 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탄성만 자아내기엔 호기심이 너무 커 절벽 아래 나선형 돌계단을 따라 약사전에 올랐다.

돌계단길 돌난간은 기와로 단장돼 있다. 난간 위엔 앙증맞은 돌탑들이 군데군데 쌓여 있다. 약사전을 올랐던 많은 사람들이 발원의 기도를 담아 쌓은 듯 하나하나에 정성이 깃들어 있다. 그 한 쪽을 곱게 감싼 덩굴식물엔 붉은 가을이 내려앉고 있다.

약사전 앞에 서는 순간, 무심코 아래로 고개를 돌리자 아! 오롯한 섬진강 물줄기 너머 가을들녘과 지리산 자락이 한 눈에 들어선다. 잗달은 상념이 산정 바람에 씻겨간다.

약사전 법당 안은 절벽에 그려진 부처가 불상을 대신하고 있다. 사성암의 불가사의한 전설이자 자랑인 마애약사여래불이다. 약 25m 기암절벽에 음각된 마애약사여래불은 원효가 선정에 들어 손톱으로 그린 부처상으로 왼손에 애민중생을 위한 약사발이 들려 있다. 약사전이 절벽에 걸쳐지게 지어진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바위 하나하나가 부처의 법의

사성암은 흔히 있는 절 마당이 없다. 대신 기암사이를 오르는 돌계단이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약사전이 그렇듯 왼편 지장전 가는 길도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지장전 돌계단도 발원의 계단이다. 난간과 돌아드는 곳마다 작은 돌탑들이 빼곡하다. 중턱쯤엔 수령 800년 된 귀목나무가 여전히 푸른 잎사귀를 활짝 펼치고 있어 그 생명력에 놀랍기도 하다.

지장전을 돌아들기 전 부채꼴의 편평한 바위가 있어 보니 소원바위(일명 뜀바위)다. 그 옛날 하동에 뗏목을 팔러 간 남편을 기다리다 숨진 아내와 아내 잃은 슬픔에 숨을 거둔 남편의 애절한 전설이 깃든 바위 겉면엔 저마다 한 가지 소원을 간직한 채 동전들이 붙어 있다.

머리에 녹색 띠를 두르고 긴 주장자를 쥔 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전은 사방이 바위로 둘러 쌓여있다. 그 모양새를 찬찬히 훑어보니 사성암은 산 정상에, 그것도 사바세계 위로 불쑥 솟은 기암절벽을 기둥삼고 거대한 바윗돌을 기단삼아 절묘하게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지장전은 나와 소원바위를 돌면 산신각이다. 지붕보다 더 높은 두 개의 바위 사이에 꼭 끼인 듯 들어서 있다. 그 옆엔 도선국사가 수도했다고 하는 도선굴이 있다. 산꼭대기 바위와 바위 사이에 난 도선굴은 한 사람이 겨우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만큼 좁지만 안은 엄숙하고도 고요하다. 도선굴을 빠져나오면 아래세상이 펼쳐진다.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이 만곡을 그리고 구례와 넓은 곡성평야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약사전과 소원바위에서 내려다 본 아래세상과는 또 다른 운치가 샘솟는다.

미륵보살이 거주하는 도솔천이 따로 없다. 전각을 감싸고 있는 바위들은 곧 부처의 법의일 따름이다.

'봄물은 구도자의 푸른 눈처럼 맑은데(春水淨如僧眼碧)/먼 산 짙은 선경은 부처의 푸른 머리라네(遠山濃仙佛頭靑)/온 골짜기 소나무 소리에 놀란 학이 꿈을 깰 제(萬壑松聲驚鶴夢)/한 줄기 달빛은 고요한 마음을 비추네(一簾月色暎禪心)'

내려오는 길. 못내 감출 수 없는 아쉬움에 뒤돌아보니 약사전 기둥 주련에 걸린 웅혼한 필치의 선시가 비로소 눈에 박힌다.

◇여행 팁

사성암을 내려와 다시 구례읍을 지나 경남 하동방향으로 길을 잡아 섬진강변을 따라 주변풍광이 아름다운 19번 국도를 달려보자. 없는 건 없고 있는 건 다 있다는 화개장터와 소설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 최참판댁까지 이어진다.

따사로운 햇살이 완연한 오후. 농익어가는 가을 정취에 한껏 물든 섬진강을 따라 뻗은 길은 맑은 강물과 지리산 자락이 빚어내는 먼 경치가 어우러져 멋스러움을 더한다.

5일장이던 화개장은 7년 전부터 상설장이 됐다. 지리산에서 캔 온갖 나물과 하동 녹차제품 등이 선을 보이고 장터 인근 늘어선 식당가에선 지역 별미인 민물참게 매운탕과 은어, 재첩을 맛 볼 수 있다.

특히 평사리 최참판댁 대청마루에 올라 내려다 본 드넓은 악양 들녘에서 벌어지는 가을걷이 풍경은 장관이다. 거둬들인 벼이삭을 말리는 남도 아낙네들 손길이 분주한 가운데 햇살은 또 어찌나 밝고 맑든지….

◇구례 사성암 가는 길=88고속도로 남원 IC에서 좌회전, 구례방향 19번 국도를 진행하다 구례교차로에서 우회전하면 구례읍이다. 이곳에서 17번 국도로 들어 문척면까지 가다가 861번 지방도로로 진입, 사성암 이정표를 따라 간다.

우문기 기자 pody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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