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쉽고 재밌게…대구 운암고 '2007 논술축전'

입력 2007-10-23 07:23:16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고, 공부를 하려면 가슴부터 답답해지는 과목이 뭐냐고 묻는다면? 학생들의 대답은 교육과정, 대학입시제도의 변화와 궤를 같이하게 마련이지만 요즘 학생들은 대부분 '통합논술'이라고 할 것이다. 그만큼 논술이 주는 부담이 크다는 얘기다. 교사들은 "통합논술은 막연히 어렵다고 여기는 학생들의 선입견을 깨기가 쉽지 않다."며 "논술 지도의 첫걸음부터 떼기가 만만치 않은 게 현실"이라고 한다. 이런 가운데 대구 운암고가 새로운 형태로 논술 교육에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을 찾았다.

▨ 논술로 무대를 만들다

20일 오후 5시 대구 운암고 강당. 토요일 오후인데도 수백 명의 학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이사이로 보이는 학부모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논술의 밤' 무대가 막을 여는 참이었다. 문학의 밤도 예술의 밤도 아니고, 그럴싸한 공연도 아닌 논술로 무대 행사를 연다는 발상 자체가 신선했다. 한편으로는 논술로 도대체 무대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걱정도 스쳤다.

하지만 두 편의 시 낭송으로 시작된 무대는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시는 예술성이 아니라 논술 교육에의 활용성을 염두에 두고 선정된 듯했다. 이어진 학급 자랑. 2학년 각 학급의 대표들이 나와 소개와 자랑을 하는 자리였다. 시간과 원고 분량에 제한이 주어진 듯했지만 학생들의 창의성은 돋보였다. 학급 구성원들이나 자랑거리를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소개하는 건 기본. 여기에 춤과 음악을 섞거나 애니메이션까지 활용하는 등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장치들이 다양하게 쓰였다. 자연스러운 무대 매너와 말솜씨는 과연 무뚝뚝한 대구 학생들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이어서 선생님과 학부모, 학생들이 서로에게 전하는 편지를 낭송하는 무대가 마련됐다. "논술의 밤에 읽기 위해 쓰다 보니 편지도 논술스러워진 것 같다."는 한 어머니와 "초등학교 때 국군 장병 아저씨께 편지를 쓴 이후 처음 같다."는 아버지가 정성들여 자녀들에게 쓴 편지는 갑작스레 떨어진 기온이 무색할 만큼 훈훈했다.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버지께 띄우는 한 여학생의 편지는 모두를 눈물바다에 빠뜨릴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언제 이런 편지를 써 보고, 읽어 봤을까 싶은 이들이었지만 마음을 나누고 서로의 뜻을 전하는 솜씨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어 보였다.

▨ 논술로만 열흘 넘긴 축제

이날 행사는 '2007 운암논술축전'의 마지막 무대였다. 축전이 시작된 건 지난 9일. 그러니까 무려 12일 동안 계속된 축제였다.

골치 아픈 논술로 어떻게 축제의 마당을 만들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일정표를 보니 축전이라기보다 학술제에 가까웠다. 하지만 쉽고 재미있게 논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가 배다 보니 딱딱한 프로그램도 학생들의 뜨거운 관심과 참여 속에 부드럽게 진행됐다. 축전을 주관한 임영구 교사는 "실생활과 접목시키면 논술은 어렵지 않다는 생각을 심어주기 위해 기획됐다."며 "축전 기간 동안 전교생 누구나 논술이라는 말을 적어도 100번쯤은 하게 만든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말했다.

각 프로그램은 묘하게도 논술과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9일부터 시작된 예쁜 엽서 만들기, 11일 저자와의 만남, 15일부터 진행된 논술 퍼즐퀴즈대회, 15일과 16일 열린 논술 경연대회, 20일의 교내 백일장과 논술의 밤에 이르기까지 궁리할 수 있는 대부분의 콘텐츠들이 담긴 듯했다. 그 사이 학부모 대상 논술 설명회가 17일 열려 자체 제작한 교재가 모자랄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교사들의 논술 대외 공개 수업이 18일 열려 대구지역 교사들의 아낌없는 박수를 받은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

김홍렬 교장은 "축전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 잘 될까 걱정도 했는데 프로그램마다 경비와 시간, 자리가 부족하다고 아우성칠 정도로 성공했다."며 "논술이 학생, 학부모들의 생활 속으로 스며드는 모습은 다른 학교에서는 생각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 토론이 된다 글쓰기가 된다

운암고의 논술축전은 논술을 주제로 한 학생들의 축제라는 성격도 있지만 교사들에게는 지난 1년 동안 연구하고 학생들을 지도해온 성과가 고스란히 담겼다는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임영구 교사의 설명.

"처음에는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한 토론은커녕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도 안 됐습니다. 앞에 나와 이야기하라고 하면 긴장해서 두 마디를 하는 학생도 별로 없었죠. 그런데 1년 가까이 논술 수업을 하다 보니 이제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단계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사실 지난해 통합교과형 논술이 교육의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을 때 학생들보다 더 큰 부담을 느낀 것은 교사들이었다. 말이 쉬워서 '주어진 문제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해 읽는 이를 설득하는 게 논술'이지 학생들에게 이를 지도한다는 것은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여러 교과의 내용을 통합해 사고하는 과정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사 한두 명의 노력만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운암고의 경우 지난해 교사들 사이에 '팀티칭(Team Teaching)'을 통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보자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쉽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팀티칭은 여러 과목의 교사들이 함께 공부하고 역할을 분담해 학생들을 통합 지도함으로써 실생활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방식.

4월부터 2학년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통합논술 학습에는 10명 이상의 교사들이 투입됐다. 논술의 기초와 어휘, 문장 등에 대해 배우는 한편 주제별·교과별로 비판적·창의적 사고력을 기르는 수업이 7월까지 계속됐다. 이어진 단계는 300자 쓰기. 여름방학 동안 학생들의 계열과 수준에 맞춰 300자 쓰기와 교사들의 첨삭 지도가 반복됐다. 2학기 들어서는 500자 쓰기로 발전하면서 하나의 주제를 두고 여러 교과의 수업과 글쓰기, 첨삭지도가 되풀이되는 과정을 진행 중이다.

임 교사는 "내년에는 1학년 때 체계적인 독서활동, 2학년 때 통합교과 논술의 단계별 학습, 3학년 때 실전문제 중심 심화 수업으로 정착시킬 수 있을 것 같다."며 "연구하고 지도할수록 학교 교육이 통합논술의 유일한 대안임에 틀림없다는 게 교사들의 한목소리"라고 강조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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