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좋은 가을, 이불을 내다 널려다 그 할머니를 또 보았다. 굽은 허리에 백발의 머리, 고랑이 깊게 팬 얼굴은 줄여잡아도 80대 중반은 넘어 보인다. 오늘도 할머니는 가랑잎 같은 몸으로, 커다란 리어카를 끌고 이 골목 저 골목을 허우적허우적 누빈다.
할머니 리어카에는 납작하게 펴진 종이상자가 절반가량 쌓여 있다. "할머니, 상자 가져 가세요." 모아둔 상자와 폐지를 안고 나가면, 받아드는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다. 가까이서 보니, 입성도 얻어입은 옷인 듯 크고 작은 여름옷을 몇 겹이나 겹쳐 입은 상태다.
이는 거의 없는지 합죽해진 얼굴엔 할머니의 마음을 추측해볼 만한 어떤 표정도 없다. 사연을 물어보고 싶다. "왜 이 연세에 무거운 리어카를 끌고 밤이고 낮이고 다니시느냐?"고. "자식은 없으시냐?"고. 할머니의 길거리 인생을 물어볼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런 할머니들이 동네마다 너무 많다는 거다.
10월에 노인의 날이 들어서인지, 매체마다 노인문제에 대한 논의들이 넘친다. 올 7월 현재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는 481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9.9%라는데,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보니 10년 후에는 노인 수가 14세 이하 어린이 수보다 많아진단다.
실제로 지인들과의 모임에서도 90세 넘는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시할머니 이야기가 줄줄이 나온다. 어느 나라에서는 고령화사회에 진입하면 거리에서 축제를 벌인다고 한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사회가 된 일이 축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복지대책이 미흡한 우리나라에서 고령화사회가 됐다는 건, 노인이 된다는 건, 국가는 물론 개인의 입장에서 축복이 아니라 대책없는 걱정거리에 불과하다.
일각에서의 '아름다운 노년'의 사례가 무색할 만큼 '늙고 병든 노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특히 폐지 줍는 할머니, 즉 도시의 여성빈민노인 문제는 심각하다. 농촌의 여성노인은 최소한 '내 먹을 것'은 생산할 수 있는 형편이지만, 도시의 여성노인은 연금이나 빵빵한 재산(성공한 효자를 포함한)이 없는 경우 남편이 죽으면 '내 먹는 것'도 걱정해야 하는 빈민여성의 길로 쉽게 들어서게 된다.
이런 도시의 빈민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아니, 정확하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이들에게 하라고 주어지는 일은 없다. 노인들이 그나마 선호하는(?) 경비나 주유원도 남성노인들의 몫이고 보면, 도시의 여성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벽보 떼고 폐지 줍는 일 외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을까?
얼마 전에 한 80대 노인이 "난 이제 아파도 병원에 안 가. 병원에 갔는데 덜컥 병을 고쳐놓으면 또 살아야 하잖아."라고 하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고령화사회라고 해서 갖가지 노인복지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삶에 대한 비전을 발견하지 못하는 노인들의 자살이 늘어나고 있고, 노인범죄도 따라서 급증하는 상황이고 보면, 떠드는 것만큼 실효를 거두고 있지는 못하는 것 같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평균수명 100세 시대를 겨냥한 실버보험까지 나온 걸 봤지만, 지난 7월 말, 미국 미네소타주, 미네아포리스 시에서 개최되었던 2007년 세계 미래포럼에서는 평균수명 150세 시대가 논의되었다고 한다.
포럼에 참석한 이연숙 전 정무제2장관은 최근 경북여성정책개발원 개원 10주년 기념 여성정책 심포지엄 기조강연에서 세계적인 두 가지 트랜드가 여성의 사회중심세력화(main streaming)와 급속한 고령사회의 진전에 따른 노년층의 정치세력화라고 소개하면서, 평균수명 150세 시대가 되면 75세가 중년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참석자들은 박장대소를 했지만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어느 날 갑자기 닥친 현실이 됐듯이 웃고 넘길 만큼 아주 먼 미래는 아닐 것 같고, 따라서 실효성 있는 노인복지 대책을 마련하는 일은 참으로 절박하고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젯밤에 쓰레기 내놓는 일이 늦어져 자정이 넘어 나갔더니, 예의 또 한 분의 할머니가 늦게 나온 쓰레기 더미에서 쓸 만한 것들이 있는지 일일이 손으로 가려내고 있었다. 옆 건물의 환하게 밝혀진 24시간 할인마트에도 다른 할머니 한 분이 상자를 그러모으고 있었다. 잠들지 않는 도시의 풍경은 이제 젊은이들의 문화로서가 아니라,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도시 빈민노인들로 인해 고령화시대의 또 다른 자화상으로 그리고 있다.
최경화(경북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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