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셋째 과정 : 기본적인 의미 찾기
단락 간의 연관관계에서 드러난 의미를 찾아가는 작업이 전략적인 글읽기의 셋째 단계이다. 결국 두 번에 걸친 분석 과정에서 나타난 구체적인 문제점을 찾아 그 답을 마련하는 과정이다. 연암은 에서 자신의 의도와 독자의 기대를 전반적으로 고려하면서, 고도로 조직된 완결된 진술을 펼치고 있다. 질문으로 의문을 제기하는가 하면 필자의 논평으로 의문을 해소해 주고 독자의 기대 심리를 상승시키기도 하고 일시에 파괴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러한 전략을 통해 드러내려는 연암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다. 연암의 글쓰기 방식은 일종의 유격 전술이다. 표면을 따라가다가는 이면을 놓치고 이면만을 보다가는 그 속에 함몰되어 버린다. 표면과 이면을 나란히 두고 본질을 찾아가는 노력 속에서 연암의 의도를 찾아낼 수 있다. 그것은 연암이 자신이 존재하는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렇게 인식된 세계의 부조리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나아간다. 이러한 문제 해결의 열쇠도 물론 의 전략적인 글읽기에서 추출이 가능하다.
앞의 두 단계에 걸친 의 분석에서 크게 세 가지의 문제점이 추출되었다.
·첫째, 순차적인 단락 전개에서 가장 중요시된 (6)의 의미이다.
·둘째, 단락들의 상호 관계에서 파악된 (2)에 대한 집중 공격의 의미이다.
·셋째, 결국 에서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의문에 대한 해결은 의 기본적인 의미 찾기와 결부되어 있다. 기본적인 의미의 이면에 담긴 본질적인 의미를 추출하는 것, 연암의 궁극적인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세 번째 의문이다. 물론 세 번째 의문은 넷째 단계의 과제이다.
먼저 살필 문제는 순차적 단락 전개에서 필자의 의도가 집결된 부분이라 한 (6)의 의미이다.
대체 저 깨어진 기왓조각은 천하의 버리는 물건이지만 민간에서 담을 쌓을 때 담 높이가 벌써 어깨에 솟는다면 다시 이를 둘씩 또 둘씩 포개어서 물결 무늬를 만든다든지, 혹은 넷을 모아서 둥근 고리처럼 만든다든지, 또는 넷을 등 지워서 옛 노전의 형상을 만들면 그 구멍 난 곳이 영롱하고 안팎이 서로 어리어서 저절로 좋은 무늬가 이루어진다. 이는 곧 깨어진 기와쪽을 버리지 아니하여 천하의 무늬가 이에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집마다 뜰 앞에 벽돌을 깔지 못한다면 여러 빛깔의 유리기와 조각과 시냇가의 둥근 조약돌을 주워다가 꽃, 나무와 새, 짐승의 모양으로 땅에 깔아서 비올 때 진수렁됨을 막으니 이는 곧 부서진 자갈돌을 버리지 아니하여 천하의 도화가 이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똥은 지극히 더러운 물건이지마는 이를 밭에 내기 위해서는 아끼기를 오금처럼 여기어 길에 내어버린 분회가 없고 말똥을 줍는 자가 삼태기를 들고 말 뒤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이를 주워 모으되 네모 반듯하게 쌓고 혹은 여덟 모로 혹은 여섯 모로 하고 또는 누각이나 돈대의 모양으로 만드니 이는 곧 똥무더기를 모아서 모든 규모가 벌써 세워졌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기왓조각이나 똥덩이는 지극히 불필요하고 더러운 것이다. 그러나 기왓조각은 담 등을 쌓기 위해서, 똥덩이는 밭에 거름으로 쓰기 위해서 나름대로 필요한 것이다. 연암의 일차적인 의도는 물론 그것들의 실용적인 쓰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실학자라면 누구나 강조했을 법한 진술이다. 그런데 연암은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이 부분이 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그런 것들에서 장관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깨어진 기왓조각을 잘 조화시키면 천하의 무늬가 이루어지고 부서진 자갈돌에서 천하의 도화가 이루어지며 똥덩이에서 천하의 규모를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장관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실제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장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연암이 의도하는 바는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태도이다. 그 정신이 장관이라는 것이다. 깨어진 기왓조각, 부서진 자갈돌, 똥덩이 등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아끼는 그 정신에서 중국의 장관인 성지, 누대, 궁실 등이 이룩된다는 의미다. 남겨진 결과인 성지, 누대, 궁실 등에 무조건 감탄하지 말고 무엇이 그것들을 만들어 냈을까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결국 연암이 (6)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앞으로 존재해야할 세계로 나아가는 방법의 제시이다. 단순히 '있는 세계'의 외면적 관찰만이 아닌 그것의 내면적 원리를 발견하여 '있어야 할 세계'를 이끄는 실제적인 방법론이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파악해야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경지를 넘어서서 사물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내려는 의 저술 의도와도 부합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단순한 여행기가 의 모습이 아니다. 단순한 견문을 넘어서서 거기에 담겨진 숨은 비밀을 캐내고 진정한 원리를 발견하려는 고뇌 찬 저작이 인 것이다.
두 번째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2)의 서술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요동 천 리의 넓고 넓은 들이 장관입디다.
구요동 백탑이 장관입디다…….
동악묘가 장관이요.
북진묘가 장관이요.
이러한 대답 속에는 감탄 이외에는 어떤 진술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감탄의 본질에는 청의 문물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도가 내포되어 있다. 오랫동안 오랑캐로 여기던 만주족에 대한 전폭적인 맹종, 그것은 또 다른 화이론(華夷論)에 불과하다. 선진 문화인 청을 배워야 한다는 미명 아래 자신들도 모르게 제2의 화이론에 젖어들고 있는 것이다. 연암은 이를 똑똑히 인식하고 있다. (3)에서 상사가 "섭섭한 표정으로 얼굴빛을 바꾼" 것은 이유 있는 것이다. 볼 것이 없다고 한 상사에 대해 으뜸가는 의리라 칭송하고 북벌을 주장한 중사를 장하다 한 것도 이유 있음은 물론이다. 즉, 연암은 제2의 화이론을 경계하면서 처음의 화이론으로 그것을 격파하려한 것이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이다. 따라서 연암은 화이론자(華夷論者)이기도 하면서 반화이론자(反華夷論者)이기도 하다. 지속적으로 화이론을 긍정하는 측면에서는 화이론자이지만 그러한 화이론을 단지 다른 주장을 격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반화이론자인 것이다. 의 다른 부분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화이론도 이런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을 통해 연암이 말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의미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청나라의 실사구시의 태도를 배우자는 것이다. 그 정신이 장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 당시의 북학파들의 주장과 동질적이다. 둘째는 오히려 오랑캐로 여기던 청나라에 대한 전폭적인 맹종도 경계하고 있다. 선진 문화인 청나라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은 또 다른 화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오히려 북벌론을 주장한 사람들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두 가지의 기본적인 의미는 분명 모순된 주장이다. 청나라를 배우자는 주장과 청나라에 대한 경계는 분명 의미가 다르다. 이러한 모순된 주장의 이면에 감춰진 연암의 궁극적인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전략적 글읽기의 마지막 작업이다. 거기에 바로 연암이 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한준희(대구통합교과논술지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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