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윤대녕의 <소는 여관으로 돌아온다, 가끔>②

입력 2007-10-16 06:53:56

청평사 대웅전 뒤편에 놓인 극락보전에는 십우도가 그려져 있다. 십우도는 어리석은 인간이 자신의 진면목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는 심우(尋牛) 단계에서 출발하여, 수행하고 정진하여 비로소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 우주와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고, 거기서 오는 깨달음으로 인간의 삼독을 해소하여 일체의 무명(無明)을 깨는 과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십우도는 선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을 뜻하는 그림이에요. 불교에서는 사람의 진면목을 소에 비유해요. 십우는 심우(尋牛), 즉 소를 찾아 나선다로 시작해요. 다음엔 견적(見迹), 즉 소의 자취를 보았다는 뜻이에요. 견우(見牛), 소를 보았다는 뜻이구요. 득우(得牛), 소를 얻구요. 그 다음은 목우(牧牛), 소를 길러요.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요,……이 그림은 팔상성도라고 해서 조계사 대웅전 벽화에도 있어요. 피리를 불며 흰 소를 타고 산에서 내려오는 그림이죠. 그리고 다음 것은 망우존인(忘牛存人), 소를 잊고 자기만 존재해요. 인우구망(人牛俱忘), 자기와 소를 다 잊어요. 반본환원(返本還原), 본디 자리로 돌아가요. 입전수수(入廛垂手), 마침내 궁극의 광명 자리에 드는 거예요. 결국 십우도는 마음을 찾고 얻는 순서와 얻은 뒤에 회향할 것을 말하고 있지요."(윤대녕, 부분)

사실 청평사를 찾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윤대녕의 이란 소설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윤대녕은 8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를 거쳐 90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나왔다. 어쩌면 평범하다고 생각되는 거기에 윤대녕의 문학사적 위치가 있다.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세계사적 변천과 오랜 군부통치의 종식이라는 국내적 요인이 어우러지면서 열린 90년대는 80년대적 세계관과의 결별을 가져왔다. 역사와 현실, 모순과 변혁으로 오로지 이야기되던 문학적 담론은 내면심리의 묘사라든가 언어와 형식의 새로움, 미적 즐거움의 추구와 같은 새로운 덕목들을 떠받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문학을 요구했던 것이다. 윤대녕은 바로 그 같은 시대정신에 정확히 부합하는 작가였던 셈이다. 작가는 민족이니, 이념이니, 통일이니 하는 사회적인 문제는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냥 그대로의 일상을 담는다. 그러면서도 윤대녕의 문학에는 정신적인 깊이가 있다. 불교적인 세계관을 내면에 깐 채 우리 삶의 본질적인 잃음과 찾음을 묘파하고 있다.

처음 이 소설을 읽고 어쩐지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전설을 접한 느낌이었다. 주인공이 여관에서 새벽녘에 들은 것 같던 뿔피리 소리나 푸른 안개처럼, 그래서 주인공의 가슴팍에 대고 비벼대는 소를 닮은 그녀의 귀와 눈을 바라보는 장면은 작금의 디지털 사이버 시대에 와서도 감당키 어려울 정도이다. 소설에서는 '소와 법당, 여관, 길 떠남'이라는 말이 반복된다. 소는 어떤 의미일까. 일찍이 소는 선가에서 자신의 본래면목을 의미하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던가?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청평사에 가지 않았다. 법당과 여관의 이미지가 중첩되면서 윤대녕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결국 우리가 애써 찾고자 하는 소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와 함께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것. 나아가 그것이 윤대녕의 눈에 포착된 90년대 우리들의 '지금-여기'의 일그러진 모습과 그 속에 감추어진 내밀한 욕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러면서 윤대녕은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나는 그 여행에서 정말 소설 속의 인연처럼 청평사 스님으로부터 '해우(海牛)'라는 소중한 이름을 얻었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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