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다면 자존심도 잊으세요"

입력 2007-10-04 16:18:43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고들 한다. 하지만 세상살이 팍팍해지면서 정말 한가위만 같았다간 다들 숟가락만 쪽쪽빨며 허릿띠를 졸라매도 시원찮을 일이다. 평소 그리 넓지도 않았던 인간관계이건만 주변에 챙겨야 할 부모'형제'지인들은 왜 그리 많은지. 언론에서는 추석이 되기 몇 주 전부터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고 떠들어대니 형편이 어렵다고 선물을 그냥 건너뛸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지난 28일 취업포터러 커리어(www.career.co.kr)가 직장인 1381명을 대상으로 '추석 명절 스트레스'에 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머니 스트레스'가 73.7%로 가장 압도적으로 손꼽혔을 정도다. 돈이 없어 서러운 이들의 목소리들을 모았다.

▲ 명절이 겁난다

종손인 김태욱(가명'32) 씨는 이번 명절 좁은 집 때문에 '정말 돈 많이 벌어야지'라고 이를 꽉 깨물었다고 했다. 사촌형제들이 큰댁이라며 김 씨의 집을 찾지만 집이 좁아 편히 하룻밤 묵어 갈 수도 없는 사정이었던 것이다. 그는 "멀리 서울에서 고향을 찾은 삼촌댁 식구들마저도 하루라도 더 편히 쉬었다 가라고 붙잡을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싫었다."고 하소연했다.

조태환(55)씨 역시 장남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형보다 더 돈 잘버는 동생을 둔 그. 동생은 고등학생'대학생이 된 조카들에게 2~3만원씩 용돈을 서슴없이 쥐어주는데, 큰아버지가 되서 달랑 만원짜리 한장을 내밀기도 얼굴 뜨거웠기 때문이다.

"제 형편에 수십만원을 용돈으로 지출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고, 그렇다고 자존심 상하는 것도 싫어 며칠 내내 스트레스에 시달렸지요. 명절때만 되면 정말 어디서 로또 대박이라도 터졌으면 하는 절박한 심정이 된다니까요."

▲나도 정말 세상에 당당하고 싶다

강진구(가명'36) 씨는 요즘 아내 얼굴을 보는 일이 가시방석에 앉는 일만 같다. 그의 아내는 임신 6개월 째. 입덧으로 한동안을 고생하더니 이제는 불어나는 몸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면 '직장 그만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도 그냥 쑤욱 들어가버리고 만다. 능력만 된다면이야 당연히 아내에게 '집에서 살림만하라'고 큰소리 떵떵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쥐꼬리 만한 월급에 혼자 벌어서 앞으로 태어날 아기의 생계까지 감당할 생각을 하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를 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는 대학생 조승주(22'여) 씨는 두세달에 한번 꼴로 휴대전화가 발신정지된다. 휴대전화 요금이 연체되면 전화를 걸수가 없기 때문이다. 조 씨는 "부모님이 부쳐주시는 돈으로 입고 먹고 생활하기만도 빠듯하다."며 "사정을 모르는 어머니나 주위 친구들은 전화를 받기만 하고 거는 법이 없다고 핀잔을 주지만, 그렇다고 부모님께 돈을 더 달라고 조르기는 너무 죄송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많은 직장인들이 공감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카드값'이다. 카드를 그을 때야 내 돈 나가는게 아니니 신나게 긁어대지만 막상 카드값 지불일이 돌아오면 한없는 고민에 빠져든다. "어디서 돈을 구해 카드값을 메우지?" 누구에게 속 시원하게 하소연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만 있어야 하는 고민 중 하나가 바로 카드값.

박수영(30'여) 씨는 "카드 결제일만 가까워지면 마음이 졸아붙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며 "한두번이 아니라 늘상 이런 일을 겪다보면 정말 돈 좀 원없이 펑펑써봤으면 좋겠다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고 했다.

▲돈 없으면 사랑도 힘들다

이동휘(33'가명) 씨는 얼마전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 양가 상견례까지 끝내고 결혼날짜까지 잡았지만 신혼집 하나 마련할 형편이 안되는 그의 집안사정을 견디지 못한 여자친구가 부잣집 남성과 선을 보고는 결국 그에게 이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에는 떠나버린 그녀가 너무나도 야속했지만 결국 결혼이란 이상이 아닌 현실이기 때문에 사랑보다 돈을 택한 그녀를 탓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라며 허탈해했다.

김동건(28)씨 역시 얼마 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매달 카드값으로 1백만원 이상을 지출하는 그녀. 사고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많아 이것저것 사달라고 조르지만 돈 한푼 벌지 못하는 대학원생 신분에 그 욕심을 다 채워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김 씨는 데이트비용의 부담감 때문에 여자친구와 만나는 횟수가 뜸해져갔고, 이것은 헤어지는 길로 가는 수순이었다.

김준구(32) 씨는 소개팅을 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정말 돈 벌고 싶은 욕구가 하늘 끝까지 솟구친다고 했다. 김 씨의 분석에 따르면 그가 분번히 퇴짜 맞는 이유는 바로 '빈티나는 외모'. 그래서 정말 한 10억 든 통장을 여자 코 앞에 들이대며 "너는 사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니까 그래서 인간이 안돼."라며 뒤통수 한번 날려주고 싶은 기분을 느낀다고 했다.

▲돈은 결국 돌고돌뿐

돈 없는 설움을 당해본 사람이면 택시비 아끼려고 왠만한 거리는 걸어다니고, 회사 회식자리가 새벽까지 길어지면 지하철 역에 쭈그리고 앉아 첫차가 운행될 때까지 기다려보기도 한다. 친구들과의 약속에서 "지갑을 깜빡하고 놓고 왔네. 담에는 꼭 내가 쏠게."라며 궁색한 변명도 하게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결국은 며칠 못가 도로 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돈으로 돌아가는 세상. 아무리 굳게 결심하고 잔돈 한 푼도 아껴보자 맘 먹지만 결국 돈을 쓰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영위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임은주(30'여)씨는 "회사 비품 가져와 살림에 보태고, 심지어는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하는 것처럼 일주일에 딱 만원만 가지고 생활을 하겠다고 버텨봤지만 이런 행동들이 돈 없는 설움을 가시게 해 줄만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인생을 고달프게 만들 뿐이었다."고 털어놨다.

얼마전 방영됐던 TV드라마 '쩐의 전쟁'에서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돈이란 인생이다." 돈이 살아가는데 도구나 수단이 되기도 하고, 어떤이에게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그 돈을 어떻게 버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담겨진다고.

조은호(39) 씨는 "돈이란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고마운 것, 그리고 조금 더 있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여력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n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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