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웃은 마을에 산다/이호신 지음·학고재 펴냄

입력 2007-09-22 07:37:18

'다시 길을 떠난다. 길은 언제나 새로운 지평으로 열려 있기에 늘 새 길이다. 전남 영암 터미널에서 광주로, 다시 구례에서 화개로 버스를 바꾸어 타고 달리면 차창엔 섬진강이 길을 따라 흐른다. 어둑한 강가엔 산그림자 짙고 비산비야(非山非野) 다랑논이 늦가을빛 속에서 황량하다. 이윽히 홀로 바라보는 강물…. 이내 풍정은 속절없는 나그네의 심상을 물들이고 스산함이 노을 속에 잦아든다.'

'우리 국토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으로 불리는 섬진강 길을 터덜터덜 가며 느낀 화가의 단상이다. 동네 주민들이 부산히 타고 내리는 버스길. 차창을 그윽히 바라보는 화가의 눈빛이 섬진강 물에 비치는 듯하다.

화가 이호신이 있다.

오랫동안 우리 문화유산과 자연생태를 바라보고 또 화폭에 담아온 화가다. 그가 2002년 1월부터 1년 4개월, 2005년 1월부터 1년 11개월. 3년 3개월간 우리 땅 곳곳을 돌며 전통과 문화, 자연을 지키고 살고 있는 우리 마을의 모습을 글과 그림으로 엮었다.

'붓길 정겨운 산골 기행'이란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지은이가 직접 마을에서 숙식하며 보고 느낀 것을 그림과 글로 썼다. 수묵담채의 마을 전경뿐 아니라 함박 주름의 얼굴을 한 정겨운 이웃의 초상까지, 따뜻한 고향의 정이 듬뿍 묻어난다. 마치 고향에서 온 엽서같다.

이 책은 총 서른 개의 글을 주제별로 분류해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했다. 1장 '참 좋은 인연'은 사람들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다. 지리산 어안동에 묻혀 사는 처사를 만나고, 경북 봉화에서는 전우익 선생의 생가를 방문하여 선생이 살다 간 자취를 더듬었다. 실패한 혁명가 박헌영의 아들이 있는 평택 봉남마을, 삼척 신선고을,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인 정부인 장씨의 숨길이 서린 영양 두들 마을의 종가도 찾았다.

2장 '전통의 불꽃'은 필봉농악을 지켜가는 고 양순용 상쇠와 그의 가족들, 전남 월출산 구림마을, 지리산 가정 마을 등 오랫동안 이어져 온 마을의 고유한 전통을 지키며 사는 이야기를 담았고, 3장 '역사와 더불어 살다'는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정신이 서린 안강의 세심마을, 강회백과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의 고향인 산청 남사마을, 달성 서씨 순흥파가 500년이 넘도록 살고 있는 영주 사천마을, 봉화 닭실마을, 안동 권씨 집성촌인 대전 무수천하마을, 추사 선생의 적거지였던 제주 대정마을의 삶을 화폭에 담았다.

4장 '물처럼 바람처럼'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금강송이 자라고 있는 울진 쌍전마을, 바닷가 다랑논으로 유명한 남해 가천마을 등 소중한 자연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20년 넘게 산천을 떠돌다 마을에 머문 지 5년째. 화가의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한 '지역 들여다보기'가 아니라 공동체 문화를 직접 체험하는 '순례의 길'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마을을 그리기에 앞서 다짐한 몇 가지 지침. '마을을 갈 때는 되도록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한다.' '반드시 마을에서 먹고 자며, 주민들과 함께 지낸다.' '마을에서 화첩을 한 권 이상 충실하게 그린다.' '주문이나 청탁에 의한 마을 그림은 배제한다.'

가공하지 않고 철저히 자연에 충실하려는 화가의 노력이 엿보인다. 스스로 필요에 의해 길이 생기고, 집이 만들어지고, 다리가 놓아지고, 담이 쌓아진 마을. 그 속에서 풍기는 고소한 인정이 익어가는 향기가 허세 없이 담백하다.

추석 연휴로 고향과 이웃에 대한 정이 그리운 때라 '그리운 이웃은 마을에 산다'는 더욱 가슴을 따뜻하게 해 준다. 447쪽. 1만 5천800원.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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