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 찾아드리는게 후손 도리"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으로 강제 징집돼 노역장, 공병부대 등에서 일하다 1944년 12월 31일 숨진 시아버지, 그를 평생 그리워하다 20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
그 두 분의 명예와 보상을 위해 노력해 온 한 며느리가 현 태평양전쟁희생자 양순임(62) 유족회장이다. 대구 중구 대신동에서 태어난 양 회장은 경북여상을 졸업하고 전남 순천으로 시집간 후 시아버지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고 매년 돌아간 남편의 생일상을 차리는 시어머니의 지극정성을 봤다.
시어머니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2년간 노역한 남편과 1943년 다시 만났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됐다. "2년만 더 일하고 꼭 오겠다."며 다시 남양군도로 끌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틈만 나면 "망할 남편, 2년 만에 온다고 약속해놓고는…."이라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양 회장은 이런 시어머니를 지켜보며 일본에 의해 강제 징집돼 희생되고도 보상은커녕 누구에게도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없었던 현실에 울분을 삼키고 있던 터. 그러다 1971년 정부의 전쟁희생자 신고기간에 시아버지를 등록하러 갔다 다른 유족들의 더 안타까운 사연을 듣게 되고 태평양전쟁 유족회 발기이사로 참여하게 된 것이 평생 이 길을 걷는 계기가 됐다.
그는 "비록 연로하고 힘없는 우리 태평양전쟁 희생자들이지만 밟을수록 더 강하고 튼튼하게 일어서는 보리와 같이 이른 시일 내에 선친들과 우리들의 제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후 투쟁과정은 산 넘어 산. 1974년 당시 정부의 30만 원 수령금 거부운동을 주도했으며 희생자들의 유해 및 영지를 모신 망향동산 개장, 일본 후생성에 찾아가 강제 징집된 명단 확인,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방일 때 희생자명단 반환 촉구 16일간 단식, 일본의 전후처리 촉구 전국 도보 대행진, 1991년 일본을 상대로 한 희생자 보상 청구소송 등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위한 일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정부의 냉대 속에 제대로 된 해결책이 나올 리 만무했다.
양 회장은 힘이 들 때마다 시어머니의 지극정성을 생각하며 유린당한 자존심과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려야겠다는 마음을 되새겼다. 이런 그의 의지는 4대에 이어 지난 2월 임기 4년의 5대 회장에 연임됐다. 전체 희생자 및 유족들을 대표하게 된 그는 3년 전부터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안' 통과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 특별법안과 의원 입법안이 발의돼 지난달 3일 정부안을 일부 수정한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2일 노무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국회가 재심의를 해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의결해야 할 입장.
노 대통령은 정부 입법안의 원안 통과를 주장, '일제강점하' 표현 법안 제목수정, 생존자 일시금 500만 원 지원 등을 요구하는 유족회와 정면 대치하고 있다.
이 수정법안이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통과된다면 오랜 숙원사업의 중요한 부분이 달성하는 셈. 희생자 및 유가족들이 일시금, 연금 등 4천여억 원을 지원받게 되고 명칭 또한 '일제강점하'가 아닌 '태평양전쟁 전후'로 바뀌게 된다.
그는 "대구·경북 출신 중에도 지난 7월 수정법안 통과 당시 반대하거나 기권한 의원들이 10명가까이 된다."며 "이번엔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3분의 2가 찬성해야 하기 때문에 적극 도와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편 양 회장은 숱한 투쟁과정 속에서도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수료(북한학과 석사과정), 통일촉진협회 초대회장 등 자기계발에도 힘을 쏟아 공부하며 투쟁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또 비엔나 세계인권대회, 일본 내 산재 유해조사 발굴 등 해외활동에도 열성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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