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단상] K의 라면전쟁

입력 2007-06-21 08:43:19

"형! 출출한데 라면 한 그릇 어때요?" 적막을 찢는 굵은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독서실 한 구석에 둥지를 틀고 주독야독 잡학을 탐하던 시절, 사람 아는 것이 싫어 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지냈습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고릴라같이 덩치 큰 녀석이 싱글거리고 있습니다. 별로 익숙하지 않은 얼굴입니다.

"댁은 뉘시오?"

K라고 밝힌 녀석의 집은 독서실 바로 뒤편이었습니다. 분식집에서 간단하게 한 그릇하면 될 텐데 굳이 자기 집으로 이끈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몇 봉지 끓일까요?" "뭐, 몇 봉지?" 순간적으로 혼란이 생깁니다. '한 끼에 라면 한 그릇, 라면 한 그릇은 라면 한 봉지'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이 충격을 받습니다.

"한 봉지면 되지"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는 녀석의 하는 짓을 살핍니다. 라면봉지를 벗기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봉합된 뒷면을 위로하고 두 손으로 라면을 움켜쥐자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집니다. 터진 봉지를 털어내어 스프와 라면사리를 분리합니다. 순식간에 라면 여섯 봉지를 해체한 녀석은 냉장고를 뒤적입니다. "계란이 세 개밖에 없네." 신이 난 녀석, 파 한 뿌리를 도마에 눕혀놓고는 난타하듯 난도질을 합니다.

라면 한 솥과 김치를 사이에 두고 둘이 대치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양입니다. '저것이 배에 들어가서 불으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포만감입니다.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전초전인 달걀전쟁에서 K는 젓가락기술의 열세로 패배합니다. 곧 바로 시작된 본 게임, K의 위력이 드러납니다. 젓가락 두 짝을 약간 벌려 잡고는 솥을 휘젓습니다. 몇 차례 반복하자 국물만 남습니다. 적을 가볍게 제압한 K,

"다섯 봉지의 비결은 불기 전에 얼른 해치우는 것입니다"

라면 봉지 배 가르듯 후딱후딱 세상사 해치우던 K, 입의 만족을 위해 배를 무시하던 K, 한동안 불기 시작한 라면의 무게에 허덕이던 K가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K, 당신은 여전히 최고의 강적입니다.

이정태(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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