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어두워지면서 급기야 비 내린다. 기어코 내리고 만다. 얼기설기 쌓아놓은 책들의 제목이 희미해진다. 어둠이 깃든 것이다. 닫힌 커튼 너머로 후두둑 빗소리, 봄비다. 계절은 다시 젊어지고, 정원의 연록 잎들은 점점 더 짙푸르러질 것이고, 이 비 지나면 필 꽃은 새삼 필 것이고, 진 꽃은 일찍 열매를 맺을 터.
어쩌나, 사 둔 상추씨를 아직 정원에 뿌리지 못 했는데. 한 송이 꺾어 탁자에 둔 작약은 저렇게 벙글어 벌써 제 잎을 주체 못해 저토록 휘청거리는데, 몇 날 며칠 뱅뱅 맴돌기만 하는 싯구는 아직도 마음을 이렇게 휘젓는데.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그 자 때문이다. 느닷없이 지난 어느 봄날 불 켜진 내 방에 찾아와 창가에 서성이다가 날 밝도록 돌아가지 않은 그 인간 때문이다. '노르웨이 숲'('상실의 시대'로도 번역돼 있다.) 이후 젊은 날 나의 문학 트렌드를 확 바꿔 놓은 소설가가 일본인이라는 것이 너무나 자존심 상해 다시는 읽지 않겠노라 결심했던 그 때문이다.
그 독서 취향은 한참 후 '우리의 김영하'를 읽으면서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양을 쫓는 모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댄스 댄스 댄스' '태엽 감는 새'도 큭큭 웃으면서 너끈히 읽어댔다. 그러나 제기랄,
카프카를 제 이름으로 삼은 십오 세 소년의 불안하기 짝이 없는 실존법을 성장소설로 포장한 '해변의 카프카'를 그 불 켜놓은 봄밤에 읽고 나자 휘잉~ 가슴과 머리에 공황이 왔다. 분명코 밤을 새운 탓에 온 것은 아닌 휘둘림.
그렇게 휘둘리다가, 어차피 스물네 시간 안에 잠들긴 글렀군, '하루키 꺼' 한 권 더 없나? 일층 쪽방에 만들어 놓은 책방에 와서 책장을 훑는다. 그때 찾아낸, 우리 도서관에서 가져다 놓은 '어둠의 저편'을 들고 와 아픈 눈을 비비며 읽는다.
허걱, 역시 하루키다. 천 년 된 소설이라 일본에서 우기고 있는 『겐지 모노가타리』를 진즉 잘 읽어두었군 생각하며 점점 쓰려오는 눈을 비비며 끝장을 내버린다. '겐지'는 몇 년 전 송재학 시인이 '도서 구입을 위해' 내가 요청한 그 리스트에 나쓰메 소세키, 아쿠다가와, 다자이 오사무와 함께 시공을 초월해 딱딱한 컴퓨터 문자와 문자 사이 동그랗게 앉았던 무라사키 시키부의 궁정소설이다.
탁자의 작약이 너무 벙글었다. 아직 입을 꼭 다물고 앉은 꽃망울이 옆에 또 주렁 있건만.
박미영(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대법원장 탄핵 절차 돌입"…민주 초선들 "사법 쿠데타"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