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 상사도 쓰고 싶다

입력 2007-04-12 17:13:47

'장'(長)이라는 접미사가 붙는 직책은 다분히 이중적이다. 어떤 부서나 조직의 우두머리가 됐다는 영예인 동시에 그만큼 책임도 따른다.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인 동시에 질투와 시기를 받는 자리다. 부하 직원들의 책임을 짊어져야하는 동시에 '윗분'들의 면피용 책임까지 떠맡아야 한다. 조직의 생리를 잘 아는만큼 겁도 많아진다. 술자리에서 부하건 상사건 실컷 욕해본 적이 언제이던가? 나이 마흔줄로 접어든 뒤부터 돈 들어갈 곳은 왜 그리 많은지? 10년만 아니 5년만 젊었어도 과감하게 때려치울 수 있었는데….

◇ 지시할 때마다 투덜대는 부하 직원

입사 12년 만에 팀장 자리에 오른 조모(41) 씨. 꿈에 그리던 팀장이 됐지만 요즘 같아서는 차라리 승진 안하는게 나았을성 싶다. 팀원은 5명. 승승장구하던 전임 팀장은 본사 부장으로 올라갔다. 구관이 명관이라던가? 사사건건 전임 팀장과 비교하는 부하 직원들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전에는 그렇게 안했는데요?", "그렇게 하면 오히려 복잡해지지 않나요?", "아직 잘 모르셔서 그러는 것 같네요." 등등. 무시한다는 생각에 역정도 내보고 이른바 '군기' 잡는다며 다분히 명령조로 지시도 내려봤지만 투덜거림은 끝이 없다. 기분 전환겸 마련한 회식자리에서 기분 좋게 "원샷!"을 외치자 고참 직원이 마치 얼르듯이 분위기를 깬다. "그냥 주량대로 마시죠." 다면평가가 도입된 뒤 팀원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도 없다. '내가 팀원일 때는 감히 상상도 못했는데….' 쓴웃음만 나온다.

◇ 비주류 팀장의 비애

중견기업 차장인 정모(43) 씨는 '출신성분' 때문에 한이 맺힐 정도다. 동기들보다 한두 해 늦게 차장에 승진한 것도 억울한데 맡은 역할도 주요부서가 아닌 지원부서다. 사내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 모임에는 가본 적이 없다. 그런 모임 자체가 없기 때문. 흔하디 흔한 고향 선배조차 없다. 언젠가 볕들 날이 있을 거라고 위안을 삼지만 부하 직원 보기가 미안하다. 말 그대로 '파워게임'에서 밀리기 때문에 승진심사때 자기 부서 직원을 적극 밀어주지 못했다. 가끔 사무실에서 직원들끼리 수근대다가 자신이 들어오면 대화가 끊어지는 것을 보고 행여 자기 흉을 보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승진을 책임지지 못하는 상사는 업무나 회식에서도 '말발'이 서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놓고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처리가 뒤처지거나 회식에 빠지는 부하를 꾸중하기도 사실 부담스럽다.

◇ 무능한 지휘관 운운하는 상사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 차장인 김모(40) 씨는 얼마 전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다. 한달 넘게 추진해 온 프로젝트 수주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담당 부장이 사무실에서 무능하다며 한바탕 난리를 피웠던 것. 따로 부장 방으로 부른 것도 아니고 다른 부하 직원들이 다 들으라는 듯이 "무슨 일을 그 따위로 하느냐? 차장 간판 달고 있는게 부끄럽지 않느냐? 당신 연봉이 대체 얼마인지 아느냐?"고 참을 수 없는 수모를 주었다. 하지만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차라리 부장과 독대하는 자리라면 '최선을 다했다', '말씀이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항의할 수 있었을텐데.

일주일에 두세번씩 꼬박 야근해가며 일을 준비한 것을 뻔히 아는 부장이 저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부하 직원들에게 미안해서 "다음엔 더 열심히 해보자."고 실컷 격려했는데 자신만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느낌이다. 평소 자기가 아끼던 사람이 담당 차장으로 승진하지 못해 '눈엣 가시'처럼 여기더니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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