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문의 펀펀야구] ⑤조동찬 타격의 힘

입력 2007-04-12 09:33:23

계란장수 부모님이 주신 '10만개'의 계란 덕

2004년 1월 하와이 전지훈련을 시작하면서 당시 김응용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류중일 코치를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특유의 짧은 말 한마디를 툭 던졌다. "조동찬이 말이야. 좀 데리고 놀아."

센스가 뛰어난 류 코치는 그 말뜻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조동찬은 힘이 있고 발이 빠르기는 했지만 수비는 부드럽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았다. 더구나 이따금 1루수의 키를 훌쩍 넘기는 악송구는 조금씩 쌓아온 믿음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단짝이 된 두 사람은 테니스공으로 포구하는 기본기 반복 훈련부터 시작했다. 류 코치는 매일 단체연습이 시작되기 1시간 전 그라운드로 나가 펑고를 받게 했고 훈련이 끝나 숙소에 와서도 틈만 나면 방으로 불러 함께 공을 가지고 놀았다. 동계훈련이 끝날 무렵 굳었던 포구 동작이 조금씩 부드러워지기 시작했고 전체적인 균형이 잡히면서 포구도, 송구도 안정감을 찾기 시작했다.

불안했던 수비가 정돈되자 타격 감각도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두드러진 장타력으로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2004년 시즌이 시작되자 조동찬은 강명구, 고지행, 박정환과 경합을 벌였던 유격수 자리를 차지하면서 주전으로 도약, 신데렐라가 되어 있었다.

3년차 신인으로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조동찬이 한순간에 고지를 점령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조동찬의 잠재적인 파워를 감지한 김 감독의 남다른 안목도 안목이었지만 그 파워의 원천이 다름아닌 계란에 있었던 사실은 정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1980년대 후반 충남 공주의 한 허름한 계란가게. 달랑 방 2칸과 연결된 계란가게는 말이 가게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두평 남짓한 공간 뿐이었다. 이 곳에서 조동찬은 형 조동화(SK 외야수)와 함께 자랐다. 방 한칸은 형제가 썼고 다른 한칸은 계란 창고 겸 부모님의 방이었다,

부모님은 늘 월세 독촉에 시달렸지만 두 아들의 뒷바라지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가난한 살림에 간식으로 먹을 거라곤 팔아야할 계란 뿐이어서 어린 동찬은 허기를 느끼면 늘 계란으로 때웠는데 부모님은 동찬이 아무리 먹어도 말리지 않으셨다. 아침은 날계란을 우유에 섞어 먹고 저녁에는 삶은 계란을 먹었다.

다행히 계란을 좋아하지 않는 형 덕분에 계란은 거의 동찬의 차지였는데 이렇게 먹은 계란이 고교 졸업 때까지 어림잡아 10만 개가 넘었다. '계란 중독'의 후유증(?)은 중 2학년 때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타구 비거리가 다른 타자에 비해 월등히 차이가 나기 시작한 것. 더욱이 스피드도 단연 으뜸이었다. 공주고에 진학해서도 힘의 차이는 더 벌어졌고 자연스럽게 4번 타자는 늘 조동찬의 몫이었다.

남다른 파괴력은 스카우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마침내 2차 1번으로 삼성라이온즈의 지명을 받았다. 그 때 받은 계약금은 1억2천만 원. 그날 조동찬은 공손히 통장을 부모님께 드리며 말했다. "아버님,어머님. 그동안 먹은 계란 값 이제 돌려 드릴게요."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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