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니 묘사해야 할까?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 영화 '300'은 영화에 대한 기존의 관념과 평가를 너머 선 곳에 존재하고 있다. 고전적 방식에 따라 이야기의 줄거리를 쫒아가보자. 스파르타군과 페르시아군의 전쟁이 있었다. 스파르타의 300명 병사들은 끝까지 장렬히 싸우다 명예롭게 죽어갔다.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116분이라는 만만치 않은 두 시간에 가까운 런닝 타임동안 진행되는 이야기가 이게 고작이라고? 물론 이게 다는 아니다. 중간 중간 왕비의 처절한 정치적 굴욕이 나오고, 남편을 살리고자 하는 그녀에게 잠시 할애된 시간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할애라는 표현에 알맞은 약간의 기미정도일 뿐 영화 '300'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스파르타군과 페르시아군과의 전투로 채워진 100여분의 런닝타임, 그게 바로 영화 '300'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 영화에 대한 길고 긴 평가는 무가치할 지도 모른다. 이 글을 100번 읽느니 영화를 한 번 보느니만 못하다. 무력하지만 그렇다. '300'은 비쥬얼에서 시작해 비쥬얼로 끝나는 희안한 작품이다. 잭 스나이더가 쓴 시나리오 가운데 이야기 자체를 위해 바쳐진 부분은 거의 없다. 아름다운 무용처럼 우아하면서도 무쌍한 움직임 그것들을 표현해내기 위해 이야기는 준비되고 소모된다. 화면을 채우는 남자들의 튼실한 육체, 그것은 이 콘텍스트 안에 그 어떤 의미도 상징도 아니다. 다만 그 육체의 탄탄함만이 관객의 망막에 새겨질 뿐이다. 건장한 남성미와 숭엄한 죽음이라는 단순한 이미지 결합이 둔중한 감각적 기억으로 가라앉는 것이다.
시각을 위해, 시각에 의해, 시각의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 '300'에서 이야기의 완성도를 따지는 것은 의미없다. 어차피 이 작품은 이야기의 완성도를 위해 계획되지도 만들어지지도 배급되지도 않았다. '300'이 제공하는 시각적 이미지는 입체마저 평면으로 만드는 역설적 초현실주의의 세계이다. 평면을 통해 입체를 구현하고자 했던 근대미술의 발전이 300명의 군사가 넘실대는 스크린위에서 휘발되고 만다. 빛의 조명도 원근감도 그리고 소실점도 인물의 육체를 위한 배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강조되는 그들의 강인한 육체 밑으로 현실성은 가라앉고 우리가 기대해왔던 관습적 풍경도 사라진다.
마치 컴퓨터 게임 속 한 장면을 보듯 LCD 브라운관 속 풍경처럼 쨍하고 어지러운 강렬함으로 압도하는 화면은 스테이지로 구성된 게임과 다르지 않다. 1단계 적을 자극한다. 2단계 적을 끌어들인다. 3단계 적에게 승리한다 4단계 결국 몰락하고 만다. 5단계 물리적 죽음 끝에 명예로운 영광이 돌아온다. 관객들은 이 사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전투를 마치 홀로그램 게임을 체험하듯 힘겹게 공감한다.
동시대 어딘가 펼쳐지는 국지전을 인터넷이나 뉴스를 통해 게임처럼 관람하는 현대인들처럼 '300'이 보여주는 전쟁 서사는 진짜 전쟁의 공포를 모르는 관객들에게 압도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피와 뼈가 난무하는 전쟁터의 시뮬레이션, 사람들은 그 곳에서 전쟁의 공포가 아닌 살육의 환희를 경험한다.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공격 본능의 카니발, 그곳이 바로 '300'의 전장, 테르모필레엔 그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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