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김덕수씨 부부와 육남매 이야기

입력 2007-03-29 16:58:38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에 사는 김덕수(61)씨가 1종 보통 자동차 운전 면허증을 땄다. 2007년 2월 20일 면허증을 받았고, 주문해뒀던 자동차(현대 포터Ⅱ)도 받았다. 그 날 그의 집 대문 옆 담에는 '축, 육남매 아빠 김덕수 운전면허 합격-6남매 일동-' 과 '경축, 풍천 어담 1리 김덕수씨 운전면허 취득-6남매 일동'이라는 플래카드 2개가 붙었다. 김덕수씨의 딸들과 아들이 한 개에 3만원씩 주고 주문 제작한 것이다.

김덕수씨의 집은 지방도로 변에 있다. 자동차를 타고 그 집 앞을 지나던 사람들은 담에 나붙은 화려한 색깔의 플래카드를 보며 웃었다. 무심코 지나쳤다가, 자신의 눈이 의심스러워 자동차를 후진해서 확인하는 운전자들도 있었다.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합격도 아니고, 자식의 서울대 합격도 아니고, 흔해 빠진 '운전면허증 취득'을 플래카드로 만들어 붙이다니! 2007년 2월말 현재 우리나라 국민 중 2천 421만 3천 853명이 자동차 운전면허증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흔해빠진 면허증인 셈이다. 그러나 길 가던 운전자들은 별 자랑거리가 아닌 플래카드를 보고,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린다.

면허증을 취득하고, 자동차를 받은 김덕수씨가 맨 먼저 한 일은 아내를 태우고 고향인 봉화군 춘양면의 부모님 산소를 찾은 일이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면허증 취득과 트럭 한 대를 장만했음을 고하기 위해서였다. 첫 운전은 두려웠다. 일찍이 면허증을 딴 맏딸이 앞에서 자동차로 길을 안내했고, 둘째 딸은 친구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타고 뒤를 지켜 주었다. 그렇게 달려가 부모님 산소에 절하고 면허증과 트럭을 보여 드렸다. 총각시절 경운기를 처음 샀던 날, 사람 걸음걸이 속도인 일단 기어를 넣고 80리 길을 밤새 달려와 밤새 문 앞에서 자식을 기다리던 어머니 앞에 섰던 이후 첫 신고였다.

운전면허증은 흔하디 흔하다. 그러나 운전면허를 땄다고 모두가 집앞에 플래카드를 내 걸지는 않는다. 생활속의 작은 일 하나에도 의미를 찾을 줄 아는 지혜가, 그리고 사는 재미가 무엇인가를 아는 가족이어야만 가능한 일인 듯하다. 넉넉하지 않는 시골생활이지만 가족의 축제가 이어지는 김씨 가족의 사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덕수씨는 잎담배와 고추, 콩, 조, 기장 농사를 짓는 사람이다. 운전면허 시험 필기에 3번, 코스에 3번, 도로 주행에 2번, 모두 8번 떨어진 후에 운전 면허증을 땄다. 첫 시험 날 가족들은 김덕수씨를 응원하기 위해 면허시험장으로 갔다. 당연히 합격할 줄 알고 축하하러 간것이라고 했다. 우습게도 그는 떨어졌다.

김덕수씨는 차에 올라앉으면 온몸이 덜덜 떨려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조차 분간할 수도 없었다. 청심환도 먹어봤고, 노래도 불러봤고, 앞사람만 쳐다보기도 했다. 그래도 소용 없었다. 잠자리에 누우면 운전대 앞에서 덜덜 떨던 자신의 모습이 한심해 피식 웃기도 했다. 그래서 '다음엔'하고 큰마음을 먹었지만, 차에 오르기만 하면 또 떨렸다. 강원도 태백의 탄광 광부시절 다이너마이트 발파 작업을 겁 없이 하던 그였는데 말이다.

"우황청심환, 그거 한 개 먹어 갖고는 아무 소용없어!"

지금은 웃으며 하는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절박했다. 세상에 그처럼 어려운 시험은 없을 것이다. 시험공부도 남들보다 어렵게 했다. 저녁 늦게까지 밭일을 했고, 새벽 3시에 일어나 6시까지 필기시험 공부를 했다. 시골이라 필기시험을 가르치는 학원은 없었다. 코스와 주행 연습은 집에서 80리 떨어진 안동의 학원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야 했다. 50분 연습을 위해 왕복 160리를 다닌 것이다.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고, 짧은 연습으로는 실력이 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올해부터 복숭아가 출하될 것이다. 1톤 트럭 한 대에 복숭아를 싣고 안동 공판장까지 가는데 5,6만원은 줘야 한다. 그 돈이 적은 돈인가? 반드시 운전 면허증을 따고 트럭을 사서 직접 공판장에 복숭아를 내야 했다. 김덕수씨가 필기시험에 합격하던 날, "어르신, 합격입니다. 합격입니다!"며 감독하던 경찰관이 더 신바람이 났다. 젊은이들 사이에 앉아 떨어지기를 거듭하던 김덕수씨가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면허증 취득 한 달이 지났지만 김덕수씨 부부의 기쁨은 퇴색하지 않았다. 운전면허증을 막 취득했거나, 시험에 임하는 사람의 관심은 온통 면허증 밖에 없다. 김덕수씨는 운전면허를 취득한지 20년이 돼 가는 기자를 앞에 두고 '운전과 교통법규'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다. 자동차간 거리를 얼마나 유지해야 하는가, 신호등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왜 조심을 해야 하는가, 운전면허 필기시험이 얼마나 정교하고 복잡한가, 어떤 문제가 얼마나 자주 출제되는가…. 마주 앉은 기자가 운전 면허시험에 관한 이야기라면 까마득한 옛 이야기쯤으로 치부하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었다. 말하자면 김덕수씨에게 면허증 취득은 '고시합격'보다 못할 게 없었다. 김덕수씨의 행복한 운전면허증 이야기 사이에 아내 권숙자씨의 놀림이 끼여들었다.

"그걸 뭘 덜덜 떨어 가지고…."

"어허, 이 사람이, 목숨이 달린 문제여! 운전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여."

김덕수씨는 "필기시험은 말입니다, 애매하게 알아 가지고는 못 풀어요. 정확하게 알아야 풀 수 있어요. 운전이 아아들 장난입니까? 정확하게 모르면 큰 사고가 나니까, 정확하게 알아야 풀 수 있는 문제를 냅니다. 사고나면 내 인생만 망치나? 괜한 사람인생을 망치는 거여."라며 운전면허시험의 어려움과 경건함, 소중함에 대해 강조했다.

아버지와 함께 운전학원에 등록했던 넷째 딸 하영은 아직 운전 면허증을 따지 못했다. 딸은 일찍이 엄마에게 이렇게 소곤거렸다.

"아버지 체면이 있는데 내가 좀 늦게 따야겠지?"

하영은 그 약속을 지켜 일찌감치 필기 시험에 합격하고도 실기합격을 미루고 있다. 이제 아버지가 면허증을 취득했으니, 실력을 발휘할 것이다.

김덕수씨 부부와 6남매는 한국사람 절반이 취득한 운전면허증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운전면허증으로 여겼고, 감사하고 기뻐했다. 운전면허를 취득한 사람이 2천 400만 명이 넘지만, 김덕수씨 가족처럼 그 기쁨을 만끽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운전이 서툰 김덕수씨는 새벽 3시, 도로에 자동차가 없는 시각에 아내를 태우고 드라이버를 나서기도 한다. 집에서 출발해 안계와 용각을 돌아 집으로 돌아오면 45분이 걸린다. 경작하는 땅이 많아 아내와 따로 일하기도 하는데, 아내가 한참 일하고 있으면 김덕수씨가 트럭을 몰고 와서 한바퀴 돌자고 권하기도 한다.

아내 권숙자씨는,

"일하다가 허리를 펴고 남편이 운전하는 트럭 타고 한바퀴 돌고 나면 기운도 생기고 재미도 있지요."라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올해 회갑을 맞은 사람이 운전면허 시험에 8번 떨어졌다면 많이 떨어진 편은 아니다. 그의 6남매가 플래카드까지 만들어 축하한 것은 아버지가 어렵게, 어렵게 운전 면허를 취득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6남매를 키우느라 허리 펼 날 없었던 아버지의 수고에 감사를 전하고, 성취를 축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덕수씨가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로 들어온 것은 1990년 12월이다. 강원도 태백의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던 중에 중상을 입었고 여섯 달 동안 병원신세를 지고 퇴원한 후였다. 부산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셋방을 구할 수 없었다. 올망졸망한 5남매(막내는 안동에 온 이후 출생-6남매 중 다섯째만 아들)를 거느린 부부에게 방을 내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안동 어담리로 들어와 농막과 토지를 빌려 정착했다. 중고 경운기 한 대를 사고, 논밭을 빌리고 나니 전 재산 500만원이 사라졌고, 쌀 살 돈도 없었다. 일년 동안 먹을 쌀을 이웃에 빌려 한 해를 살았다.

김덕수씨 부부는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했다. 산 비탈진 곳에 있어 주인이 부치기를 꺼리는 땅에도 깨를 심어 거뒀다. 송아지 한 마리를 샀고 그 송아지가 자라서 새끼를 낳았고 한 마리씩 늘어났다.

김덕수씨는 늘 10마리가 안될 정도로 소를 키운다. 그는 소가 참 좋다고 말한다. 급할 때는 돈이 돼 주니 좋고, 거름이 나오니 농사에도 도움이 된다. 집에 소가 있으면 농협에서 대출도 척척 잘해준다. 소가 새끼를 낳으면 팔아서 논밭을 샀다. 이번에 트럭을 장만할 때도 새끼 밴 소를 팔아 선금을 냈다.

김덕수씨는 6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느라 매일 돈 꾸러 나가는 게 일이었다고 했다. 남의 농막을 빌려 살던 그는 1995년 11월 소 다섯 마리를 팔아 집터를 사고 지금 사는 집을 지었다. 문짝만 목수가 만들어주었다. 나머지 일은 김덕수씨 자신이 직접 했다. 곡괭이로 기초를 파고, 대들보를 올리고…. 22일 걸렸다.

"요즘은 사는 재미가 있습니다."

6남매 중 네 아이들이 반듯한 직장을 가졌고, 두 아이는 아직 학교에 다닌다. 정착 초기 양식을 빌리는 처지였지만, 지금은 어담리 일대에서 논밭 농사를 가장 많이 짓는 사람이다. 자신 소유의 논밭 4천 200평에, 남의 땅 부치는 것까지 합치면 1만 2천 평이다. 그 너른 땅을 부치자니 쉴 틈이 없지만 즐겁다. 주말이면 구미와 수원에서 직장에 다니는 딸들이 집에 와 농사를 거든다. 자식들이 아니면 그 너른 땅을 어떻게 다 거두겠는가. 이 착한 딸들은 직장에 다니면서 자신이 번 돈으로 대학에 진학했고, 맏딸은 졸업했다.

김덕수씨 집 대문 옆에는 술병이 가득한 포대가 있었다. 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인심이 좋아도 너무 좋은 사람이라는 게 아내의 평가였다.

'한번은 낯선 사람이 찾아와 방금 수확한 옥수수를 쳐다보며 팔기를 종용했다. 김덕수씨는 우리식구 먹을 옥수순데, 팔기는 그렇고, 가져가서 드시라며 50개를 주었다. 대구 매천시장 상인이라는 이 사람은 그 고마움을 잊지 않았고 요즘도 집 앞을 지날 때면 산지에서 구입해 시장에 내다 팔 제철 과일을 내려놓고 간다.'

아내는 젊은 시절엔 인심 좋은 남편을 원망하기도 했다. 집이 길가에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들리면 술과 음료수를 척척 나눠주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개장수도 사정이 딱하다 싶으면 농사지은 마늘 한 접 뚝 떼 줘니 내가 참…."

아내의 다소 원망 섞인 듯한 말에, 김덕수씨는

"이 사람아, 술 한잔씩 하면서 농사 이야기도 나누고, 이웃 지간에 정도 쌓고 얼마나 좋아. 하다 못 해 술 한잔, 물 한 모금 마신 사람들이 우리 밭에 오줌이라도 누고 가니 얼마나 좋아?"

술 이야기를 하던 김덕수씨. 평소에 두세 사람이 마주 앉으면 2홉 짜리 소주 3,4병은 좋게 마셨지만 요새는 딱 끊었다고 한다.

"(트럭에) 맨 정신에 타도 덜덜 떨리는데, 술 마시면 큰일나지요."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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