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 어느 백혈병 어린이

입력 2007-03-22 07:32:45

소아과에서 수련의(인턴) 과정을 밟고 있던 시절의 일이다. 백혈병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는 아이들은 항암제의 부작용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져, 대부분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지낸다. 그래서 한 진료과를 한두 달씩 순환 근무하는 수련의로서는 누가 누군지 잘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유난히 어른스러워 보이는 일곱 살짜리 아이와 그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던 엄마가 기억에 남는다. 어른도 견디기 힘든 항암 치료 과정 속에서도 항상 밝게 웃고 활달해 오히려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시름을 덜어 주었고, 입원한 다른 아이들에게도 위안과 즐거움을 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아이였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병동을 오가던 어느 날, 우연히 화장실에서 한 어린이의 신음 섞인 울음소리를 들었다. 잠긴 문을 두드리며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한참 동안 대답이 없어 무슨 큰 일이 났다 싶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그 아이였다. 항상 밝게 웃던 아이가 화장실 한구석에서 혼자 쪼그리고 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아이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오늘 골수 조직 검사를 받았는데 너무 아파 울고 있었단다. 그러면서 엄마에겐 절대로 비밀로 해 달라며 몇 번이나 당부했다. 사실 항암 치료의 효과를 판정하기 위한 골수 조직 검사(엉덩이에 있는 뼈를 굵은 바늘로 뚫고 골수를 채취하는 검사)는 국소 마취를 하더라도 어린 아이에게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지난번 몇 번의 골수 검사에도 전혀 아픈 기색 없이 잘 지내더니 오늘만 왜 이러냐고 물었다. 아이는 "병실에서 고통스러워하며 울면 자기를 보고 미안해하는 엄마가 같이 슬퍼하고 눈물을 흘려 항상 이렇게 혼자 고통을 참고 있었어요."라고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흰 가운 휘날리며 폼 잡고 다니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의료인들은 아마도 누구나 이 같은 경험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경험들은 지치고 힘든 병원 생활 속에서 사명감을 잃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대개 환자들이 병원을 찾는 이유는 신체적 질병을 치료하기 위함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조사에 따르면 환자들이 병원을 찾는 더 많은 이유는 신체적 고통보다 자신에 대한 관심과 대화, 즉 심리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대학병원 교수로 근무하던 시절, 줄지은 대기 환자 때문에 제한된 시간에 많은 환자를 봐야 했던 현실이 떠오른다. 그때 질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주눅이 들어 찾아온 환자의 아픈 마음까지 챙겨 줄 여유가 없어 마음이 아팠다. 이제 개업을 한 의사로 살아가면서 비록 병원 경영을 고민해야 하는 현실적 문제에 부닥쳐 살고 있지만, 개인 병원이라는 좀 더 편안하고 친근한 분위기 때문인지 쉽게 마음을 열고 사담을 곧잘 털어놓는 환자들을 자주 보게 된다. 이런 환자들을 통해 질병의 이면에 있는 삶의 모습을 보고 같이 공감할 수 있어 행복하다. 문득 오래전 혼자 울던 그 아이가 보고 싶다.

윤현대(라파엘내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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