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시평] 독도가 전부는 아니다

입력 2007-03-07 09:09:24

3.1절이 있는 3월이면 유관순, 안중근 등 일제에 대항하다 순국한 의사들을 떠올린다. 동시에 일본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는 일본은 당연히 제국주의, 식민지배자로서의 일본이다. 조금 더 비약하자면 타도 대상으로서의 일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과의 대결에서는 꼭 이겨야 하고, 그 승리를 통해서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대표적인 것이 축구와 독도다. 축구는 지면 또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러나 독도문제는 한번 양보해버리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민감하다. 독도문제에 대한 우리의 대응 논리와 수단이 증폭되고 있는 이유다.

2006년 4월 일본의 해상보안청이 독도 주변의 해양조사를 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전국가적으로 일전 불사의 태세로 이에 임했다. 대통령은 국가안보회의와 여야당 대표 회담을 주재하는 등 전시를 방불케 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회담에 참석한 여당 대표는 "대통령은 전투를 앞둔 장수와 같았다"고 비장한 분위기를 전했다.

일본을 비롯한 외신은 한국의 대응 자세를 지나친 과잉이라고 보도했다. 독도는 한국 수비대가 현실적 점유를 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전쟁을 불사할 필요가 있는 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물론 독도는 우리 주권의 상징이다. 그것이 시기적으로 '을사보호조약' 전단계의 시점에서 일본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독도의 주권 상실은 한반도 전체에 대한 주권침탈로 연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역사의 연쇄 기억이다.

일본은 어떨까. 일본은 독도를 전쟁을 해서라도 빼앗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의 과잉 대응을 한국의 국내용으로 치부하면서 이러한 상황을 외교적으로 역이용한다. 한국에서 약 25년간 특파원 생활을 한 일본의 어느 신문기자는 일본에 대한 한국의 과잉반응을 '1945년 8월 15일의 한(恨)'으로 진단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겨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고 싶었으나, 1945년 8월 15일은 연합국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국은 그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 때의 울분을 발산하기 위해서는 싸움에서 이겨야 하고, 독도와 축구 경기에서의 열광은 한국인의 그러한 잠재된 심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한국의 일본에 대한 반응은 과잉의 측면이 있다. 독도는 더욱 그러하다.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독도에 관련된 것이면, 우리 외교는 오직 독도문제에만 매달린다. 그러다 보니, 한일 간의 외교관계에 있어서 다른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독도는 우리가 점유하고 있는 상태의 현상유지로 충분하지 않은가. 잃어버릴 염려가 없는 하나를 지키기 위해 다른 것을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독도가 전부가 아닌 것이 아니라, 독도를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독도는 이미 우리의 것이며, 전쟁을 하지 않는 한 빼앗길 염려는 없다.

우리는 보다 큰 구도에서 한일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최근 중국과 일본은 급속히 관계를 개선하고 있는 반면에 한일 간의 외교관계는 매우 불안정하다. 예를 들어 제2차 한일역사공동위원회가 작년에 출발했으나, 일본 쪽은 인선조차 하지 않고 있다. 관심 밖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중국과의 역사공동위원회에는 열을 내고 있다. 올 초의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노대통령이 조기귀국한 후 한국이 반대하는 내용의 의장성명을 중일간의 합의로 채택했다. 그렇다고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니다. 동북공정과 백두산 공정, 간도 문제 등 독도 문제보다 더 심각한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개선되고 한국이 외교적으로 고립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유관순 열사와 안중근 의사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순국했다. 특히 안중근 의사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조선민족이 총을 들기보다는 책을 읽기를 권했다.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은 것처럼 불편하다)라는 그의 휘호가 이를 말해준다. 이성적인 국민이 되어 일본에 대항해 국가의 독립을 지키라는 유지(遺志)이다.

이제 한국도 일본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만한 정도의 국력을 가졌다. 100년 전의 역사의 기억으로 미래를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일본을 카타르시스의 대상으로만 생각할 단계는 지난 것으로 판단된다. 동북아의 중심 국가는 아니더라도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큰 구도에서 한중일 관계를 새롭게 생각해 보자.

이성환 계명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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