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연주회가 있었다. 연주회가 시작되면 한 사람의 피아니스트가 걸어 나와 피아노 앞에 앉는다. 악보를 앞에 놓고 숨을 가다듬은 뒤에도 연주자는 계속 그대로 앉아 있다. 1분, 2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때부터 청중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코를 훌쩍이는 사람, 무슨 영문인가 싶어 옆을 돌아보는 사람, 팸플릿을 다시 뒤적이는 사람, 이대로 그냥 기다려야 할지 말지를 몰라 속으로 갈등하는 사람, 이게 무슨 연주람..., 그러다가 청중을 조금씩 화가 나게 하는 그런 연주 말이다.
도무지 아무 소리도 없는 저 연주는 무어란 말인가, 투덜대다가, 급기야 벌떡 일어나는 사람도 있다. 침묵의 연주, 연주자는 계속 피아노 뚜껑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고 예비한 악보를 차례로 넘기다가 정확히 4분 33초 뒤에 자리에서 일어서 나간다.
'4분 33초'는 미국의 전위 작곡가 존 케이지가 작곡한 것이다. 그가 노린 것은 바로 이것, 상식과 통념을 깨뜨리고 아무 소리도 없는 연주를 하면서 청중의 반응을 살피는 것. 그는 분명히 악보를 가지고 있었으며 4분 33초 동안 연주를 하였다. 다만 소리가 없이 행위로만 연주했을 뿐이다. 우롱당한 것은 청중이다.
모든 관객들의 시선이 피아니스트를 향해 그가 연주할 때까지 뚫어져라 보고 있을 터였지만 실상 피아니스트가 관객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기존의 통념을 부숴버린 존 케이지의 발상은 신선하다 못해 경이적이다. 그리고 그 시간 청중이 보여준 반응들이야말로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예술이 아니었을까.
이렇듯 예술가는 누구나 하는 것을 더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도 하지 않는 것을 하는 사람이다. 또한 그러한 작업은 없는 것을 창조하는 것이라기보다 이미 있었던 것, 혹은 숨어 있던 것을 뒤집어 보거나 새로운 시각으로 발견해 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성한 전시장 안에 변기를 설치해 놓고 '샘'이라 명명한 뒤샹의 경우도 상식의 전복이 아닌가.
말하자면 존 케이지는 피아노가 무언지를 연주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청중이 피아노를 알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그 때, 명민한 청중은 가장 확실한 피아노 소리를 들었을 것이며, 그 피아노 연주가 의미하는 침묵의 소리를 적었을 것이다. 내가 청중이었다면 나는 어떤 생각,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 이런 일은 꼴 백번 상상해 봐도 재미있다.
이규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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