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예술을 낳는다] ③화가 권기철

입력 2007-02-16 07:25:06

사람의 기억은 믿을 수 없다.

마치 저격수처럼 잠복하다가 스스로 변형하고 왜곡시킨다. 어떤 경우 통째 없애버리기도 한다. 화가 권기철(45)의 상처가 그렇다. 다섯살 때 작두에 오른손이 잘렸다. 그러나 그 전후 다른 일들은 기억하는데, 이날의 기억은 없다.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공포가 그 기억을 뇌세포에서 제거했을 것이다. 그도 "철들어서 그걸 기억하려고 애를 썼는데도 기억이 안난다. 그게 희한하다."고 했다.

겨우 이어붙인 그 손으로 붓을 잡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왼손은 파워, 오른손은 완충역할을 한다."며 "아주 섬세한 작업은 오른손으로 한다."고 했다. 작두의 시퍼런 날이 지나간 그 손을 그는 "나의 보배"라고 했다.

권기철은 가시관을 쓰고, 가시나무를 한 짐 지고 가시밭길을 걷는 사나이다. 고통과 절망, 연민과 열정이 요절한 화가 장 미셀 바스키아(1960~1988)의 낙서작품처럼 빼곡하게 들어찬 삶이다.

그의 상처 얘기를 듣는 것마저 고통이었다. 그래서 처음 만난 자리에서 대취(大醉)해 버렸다. 취재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고통스런 어린 날의 기억은 수성구의 한 막걸리 집에서, 그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 둥지 튼 가창의 작업실에서 들었다.

그의 부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9남매 중 배다른 형 둘은 맹인과 꼽추가 됐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운데 초등학교를 마치고 가출해 신문배달을 하며 혼자 힘으로 중.고교를 다녔다. 그리고 이혼까지... .

대학 1년이던 1983년 어머니가 있던 영주에 갔다. 호미로 밭을 갈던 어머니는 "잘 되재?"라고 물었다. 그는 "멀었어. 화가란 것이 가난해. 나이 마흔 넘어야 입에 풀칠할 수 있을거야."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1주일 후 어머니는 연탄불을 피워놓고 삶을 버렸다. "그때 '잘 될거야. 조금만 기다려봐'라고 했더라면... ."

가난은 그의 가장 큰 절망이었다. 어려서 그림을 그리고, 붓글씨를 썼지만 한 번도 붓을 사 본적이 없다. 모두 얻거나 주워 쓴 것이었다.

"미웠지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어. 나중에 커서 생각하니까 측은해. 아버지도 아홉 살에 고아가 됐거든.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으니까, 사랑을 하는 법도 몰랐을거야. 그래도 엄마가 더 처절하지. 아버지는 농약 마셨어."

초등학교 6년 동안 가출을 꿈꿨다. "집에서 뒹굴고 떼를 써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 6년 동안 꼬박 신문배달하며 중.고교를 다녔다. 형제 중 유일하게 중졸 이상의 학력을 갖고 있다.

모든 고통을 감내하게 한 것은 '화가의 꿈' 때문이었다. 신문 배급소에서 매를 맞아가며 끼니를 해결하고, 라디오가 유일한 친구였던 어린 시절의 상처, 그보다 더 컸던 것이 "그놈의 꿈"이었다.

"살아 있는 기분이 들어. 펄펄 뛰지. 첫사랑을 만나는 설렘과 두근거림. 그런거야." 그림을 그릴 때 어떤 느낌이 드느냐고 묻자 그가 한 말이다. 붓을 들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틀어놓고 캔버스와 대결한다. "그 대결에서 내가 그 놈을 제압해야 그 속에 깊숙이 들어갈 수 있어. 그 대치하는 순간이 짜릿하지."

상처는 그의 작품에 녹아 있다. 피같이 빨간 손, 철조망 가시가 휘감은 손, 잘려나간 손... . "물감을 손에 칠해 캔버스를 문지르는 순간 내 상처가 반영되는 거지. 나의 상처, 나의 정체성이 그림 안에 콕콕 박히는거야."

뼈를 바꾸고 태를 빼내는 것(換骨奪胎)만큼 고통스런 것이 있을까. 그는 그 길을 자청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전복하고, 진화의 꿈을 꾼다.

7~8년 전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뼈를 바꾸었다. "구상은 껍데기를 재현하는 것이야. 비구상은 시간과 공간, 시각적 비주얼을 표현하는 것이지. 재미있지." 그는 지금 자신의 에너지를 20~30%만 쓰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지난 10년 동안 개인전을 20번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무감에서 나온 강박이었다. "잘못 왔다. 그거 깨닫는데 10년 걸렸어. 이제 다른 방식으로 갈거야."그 화두가 바로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나를 없애고, 나를 태워버려야지." 마치 흙이 흙으로 남으면 도자기가 안 되듯이, 그는 자신을 1천800도 가마 불에 태우려고 하고 있다. 무아(無我), 무위(無爲)....

"상처는 긁고, 드러내고, 해체시켜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사라진다." 그가 취재수첩을 덮는 기자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약력

1963년 경북 안동출생. 영주 중.고 졸업. 경북대와 영남대대학원에서 한국화 전공. 서울·대구·부산에서 20회의 개인전. '미술로 보는 스포츠와 놀이전' '서울 국제아트페어' '새로운 세기의 징후전' '광주비엔날레 음식기행전'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으며 현재 경북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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