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은 세뱃돈을 기대하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누구나 넘치는 음식과 따뜻한 아랫목, 화기애애한 덕담을 기대한다. 마땅히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도 많다. 1950년 12월부터 1951년 2월까지, 설을 낀 두 달 남짓한 시간,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는 공포와 죽음, 굶주림과 추위만 존재했다. 신원면은 700∼900m대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지세다. 그 분지 안에 마을이 있고 논밭이 있었다. 설날을 조금 앞둔 시점부터 이 깊은 골짜기에 인간의 광기가 배회했다.
산 속에 진지를 친 빨치산들은 식량과 물자를 마을에서 조달했다. 협조하지 않는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다. 경찰은 빨치산과 협조한 혐의가 있는 사람을 잡아서 조사했다. 무엇인가 꼬투리가 될 만한 말을 하면 잡혀갔고, 누군가 잡혀가면 빨치산이 보복했다. 마을 사람들은 양쪽 모두의 눈치를 보느라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겨울인데다 산에 사는 400∼500명의 빨치산의 무리한 공출로 죽조차 먹기 힘든 형편이었다.
설을 앞두고 있었지만 이 소설에서 설이라는 말은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몇 번 등장하는 그 말 역시, 설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우울을 강조할 뿐이다.
'하룻밤 눈만 붙이고 나면 음력설이었다. 그러나 대현리 사람들은 제사 상에 죽 그릇과 나물반찬과 냉수 사발밖에 올릴 수 업는 처지여서, 아무 집도 제사음식 준비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대동아 전쟁말기, 그 심한 공출에 볶일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며, 조상을 제대로 못 모시는 죄로 가슴을 썩이며 한숨을 쉬었다.' -하권 435p.
설날은 또한 오직 시간의 흐름에 대한, 자식을 찾으려는 안타까운 설명일 뿐이다.
'산에 진을 친 빨치산들이 공출을 위해 밤에 마을로 내려온다. 늙은 실매댁은 보초를 선 소년병에게 말을 붙인다.
"그라모 우리 한득이는 안 내리왔다는 말이지요? 내 자식 한득이는 인제 열 아홉이구마, 설 쉬모 스물이고요"
"아즈마에요. 우리 중대에는 한득이라고 그런 이름이 없십네다. 제가 한번 알아는 보겠음네. 문한득이라 해잲입지요?" 어깨에 장총을 매고 있던 소년병이 대답하였다.
"예, 문한득입미다. 나이도 병정만 하겠네요. 이거 꼭 그 놈 자식한테 전해 주이소. 짚신 두 켤레하고 버선 두 켤렌 데요. 꼭 좀 전해주이소." 실매댁은 소년병 얼굴 앞에 자기 얼굴을 바싹 들이민 채 손에 들고 있던 버선과 짚신을 건네 주었다.' -상권 187p.
실매댁의 아들 문한득은 빨치산이다. 어머니는 빨치산들이 마을로 내려오자 자기 아들의 안부를 묻고, 전해질지 어떨지도 모를 짚신과 버선을 건네준 것이다. 빨치산이 된 문한득은 눈앞에 고향 마을을 두고 있었고, 내일 모레면 설이지만 집에 갈 수 없었다.
불행은 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1950년 12월5일 빨치산이 신원면 양지리의 경찰 분주소를 습격하고 점령한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경찰들이 죽고 몇 명은 도망친다. 그리고 다음해 2월7일 국군이 신원면에 진주한다.
신원면에 진주한 국군은 이 일대 주민 700여명을 골짜기에 몰아넣고 학살한다. 이른바 '견벽청야 작전(말썽의 소지가 있는 곳을 초토화시킨다)'이었는데 '거창양민학살 사건'이다.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였다.
소설 '겨울 골짜기'는 빨치산의 신원면 점령 직전부터 '거창양민학살사건'까지 비극의 전개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물론 사건의 뼈대 외에 대부분의 상황은 작가의 상상이다.
설이라는 시점을 가운데 두고 있지만 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상황은 극도의 굶주림과 극한의 추위다. 그 묘사는 상상이기는 하지만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설날 세뱃돈과 따뜻한 아랫목, 화기애애한 얼굴로 주고받는 덕담은 얼마나 고마운가.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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