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국채보상운동 100년] ①역사적 인물들

입력 2007-02-05 09:03:01

'단연(斷煙)으로 돈을 모아 나라 빚을 갚자.'며 대구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번졌던 국채보상운동이 오는 21일로 100주년을 맞는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와 대구시, 매일신문 등은 100주년을 기념, 2월 한달 동안 다양한 기념사업과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남녀노소, 신분, 직업에 관계없이 전 국민이 참여, 일제의 침략에 맞선 국민운동으로 대구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여주고 있는 국채보상운동의 면면을 5차례에 걸쳐 되짚어본다.

역사적 인물들

국가보훈처는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킨 두 주역이었던 서상돈과 김광제를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김산군 마잠(현 김천시 지좌동) 출신의 서상돈은 당시 대구 최대 인쇄소였던 광문사 부사장이었다. 서상돈은 1907년 2일 21일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운동'에 앞서 1월 29일 광문사 사장이었던 김광제(충남 보령 출신) 등 10여 명과 광문사에서 만나 "대한제국이 진 빚 1천300만 원을 갚아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며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했다. 서상돈은 그 자리에서 800원을 내기로 했고 김광제는 3개월 동안 담배를 끊으면 모을 수 있는 돈 60전과 의연금 10원을 내놓았다.

박정동은 당시 북후정(현 대구시민회관)에서 2천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에서 연단에 올라 "건강에 해로운 담배를 3개월 끊어 그 돈으로 나라 빚을 갚자."고 역설했다. 박정동은 사진 등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서상돈과 김광제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대구군민대회를 시작으로 촉발된 국채보상운동은 고종 황제와 양기탁 등에 의해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조선 제 26대 임금인 고종(대한제국 초대 황제)은 1907년 2월 26일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칙어를 내리고 단연을 몸소 실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참정대신 김성근은 의연금 100원을 대한매일신보사에 기탁했다. 고종은 단연으로 국채보상운동에 냉소적이었던 정부대신들의 마음을 돌리게 했다. 양기탁은 당시 대한매일신보사 주필로 '국채 1300만 원 보상취지'를 신문에 싣는 등 국채보상운동을 주도적으로 보도, 전국으로 확대되도록 했다. 국채보상기성회 총무를 맡았던 양기탁은 1908년 7월 일제에 의해 모금된 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됐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또 김성희, 유문상, 오영근 등은 대구군민대회 다음날인 2월 22일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를 설립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국채보상기성회는 취지서와 회칙을 발표하는 등 국채보상운동 총괄 기구의 역할을 했다. 서병염, 윤흥섭, 박규순 등은 '국채보상포고문'을 발표하고 국채보상중앙의무사를 설립, 국채보상운동의 확산을 도왔다. 유길준은 국채보상운동 과정에서 모금된 돈을 처리하기 위해 설립된 '국채보상금 처리회'의 회장을 맡았다.

단천 국채보상소의 발기인 이병덕, 김인화 등은 "애국심이여, 애국심이여, 대구 서공 상돈일세."로 시작하는 노랫말이 담긴 '국채보상가'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김교성기자 kgs@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