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에서)생각을 도둑맞다

입력 2007-02-03 07:16:37

크리에이티브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아이디어다. 기발한 아이디어의 탄생은 훌륭한 기획력의 원천이며 생명인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양 사방이 막힌 공간에 앉아있는 것처럼 생각을 원천 봉쇄당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짜내고 기획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 이 일의 속성이다. 아이디어없이 기획이 탄생할 수 없고 기획력 없이 콘셉트가 바로 서지 않으며, 클라이언트의 폭넓은 수용력 없이 그것이 현실화되기도 어렵다. 한마디로 모든 것들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한 일이다.

편집기획이라는 일을 처음 시작하던 때, 견적서에 기재된 '기획비'라는 항목을 지적하는 클라이언트가 종종 있었다(사실은 대부분). "기획이 제대로 서야 바로 간다"는 우리의 신념이 일순간 무너지는 일이 왕왕 있었는데, 정작 실무를 하기도 전에 클라이언트의 인식 전환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 당황스러웠고, 당연한 것에 대해 긴 설명을(설득을) 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다행히 요즘은 클라이언트의 인식도 많이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일들로 인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많았던 것 같다. 어떤 클라이언트는 기획비 절감을 위한 자구책으로 , 모델이 될 만한 결과물을 가지고 와서 "이것처럼!"이라는 황당한 제안을 하기도 하고, 출처도 알 수 없는 일러스트레이트를 가지고 와서 사용해달라는 요구를 당당히 하기도 해 난처한 때도 있었다.

얼마 전 한 분기에 발간된 세 군데 업체의 소식지에 같은 사진이 사용되는 웃지 못할 사건을 전해 들었다. 가끔씩 사진이나 일러스트레이트를 도용해서 법적인 제제를 받은 이야기도 듣는다. 고가의 사진원고나 일러스트레이트에 치러야 할 비용과 시간 절감의 한 방편으로 안일하게 생각하는 모르지만 한 컷의 사진과 한 컷의 일러스트레이트, 하나의 편집물에는 누군가의 정신과 에너지와 뜨거운 열정이 녹아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출처를 알 수 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넘쳐나는 이미지들을 저항없이 사용하는 일은 무조건 자제해야 할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롭고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짜내가며 작업하는 디자이너와 기획자들의 고통스러운 밤샘이의 이유를 아는가? 그들은 고민의 양이 부족한 책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그것이 독자들을 찾아가도록 방임하지 않을 의무가 자신에게 있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나윤희 홍익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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