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대학에 근무한다는 분의 전화를 받았다. 정시모집 대학지원 기준표가 신문에 실린 다음날이었다. 그는 대뜸 "무엇을 근거로 이런 기준표를 만드느냐?"고 물었다. 전년도 입시 결과와 올해 수험생들의 성적 분포, 대학 선호도 등이 반영된다고 답했다. 그러자 대학과 학과의 서열은 누가 정해서 높은 점수, 낮은 점수를 주는 거냐고 따졌다. 교육부가 수험생과 대학 서열화를 막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데 점수로 서열을 매기는 건 잘못된 게 아니냐는 얘기였다.
이런 전화는 지원 기준표를 실을 때마다 연례적으로 받아온 것이다. 때론 설전을 벌이기도 하고, 때론 현실을 함께 허탈해하기도 했지만 종국에는 '필요악'이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됐다.
교육계에서 흔히 '배치기준표' 혹은 '잣대'로 불리는 대학지원 기준표는 그 생성과 변화의 역사를 보면 끊임없이 입시 제도를 바꾸는 교육부의 공격에 대한 교육계의 응전으로 풀이된다. 지난 십수년 동안 교육부의 공격 목표는 실력에 의해 결정된 수험생들의 석차를 무너뜨리고, 자체 경쟁력과 수험생의 선호에 좌우되는 대학들의 서열을 무너뜨리는 데 맞춰져 왔다.
'한 가지만 잘 해도 대학에 갈 수 있다.'(2002입시), '자신의 적성과 진로에 맞춰 대학을 선택한다.'(2005입시), '학교 공부만 잘 해도 원하는 대학에 간다.'(2008입시)는 구호들이 전술적으로 동원됐다.
이런 와중에 골병이 든 건 수험생과 교사들이다. 진학지도를 담당하는 교사들은 입시제도 변화에 맞춰 대학 지원 기준을 만드느라 골머리를 앓아왔다. 하지만 수험생들의 수능시험 성적 분포조차 공개하지 않는 교육부의 집요함을 이겨내고 공정한 기준을 만들기는 힘들었다고 토로한다.
이는 경쟁의 결과에 불복하는 숫자만 늘려놓은 꼴이 됐다. 실력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 지원 전략을 잘 세워서 자신보다 못한 수험생이 더 나은 대학에 간다면 누가 승복할 것인가. 20년 전에 비해 대학 수와 모집정원이 엄청나게 늘어 수험생 수보다 많아졌는데도 재수생 비율은 그다지 줄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내년에는 또 새로운 대학입시 제도가 도입된다. 교육계에선 성공보다 실패의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교육부가 현실적으로 엄연한 서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한 수험생과 교사들은 고통과 불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들 걱정한다.
선진국 가운데는 초등학교부터 서열을 공개하는 나라가 적잖다. 학생, 학부모의 선택권을 보장함으로써 공정한 경쟁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취지다. 우리나라처럼 교육열이 남다른 상황에서 초·중등 과정의 서열을 공개하자는 건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의 서열 공개에 대해서는 다른 발상이 필요하다. 입시의 공정성 확보뿐만 아니라 구조조정 측면에서도 이제는 진지한 논의가 불가피하다. 대학 서열화를 금기로 여기면서 '세계 100위, 50위에 드는 대학을 만들자'고 부르짖는 건 무슨 논리인가.
김재경 사회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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