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권의 책] 내일의 기억/오기와라 히로시

입력 2006-12-21 16:07:48

광고회사 영업부 부장인 사에키는 올해 나이 쉰으로, 스스로 아직 팔팔하게 일할 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날 그에게 '알츠하이머'가 찾아온다. 그래서 조금씩 기억과 지적 능력이 사라진다. 특히 최근의 기억부터 사라지고, 간단한 계산을 못하게 된다. 직원들 이름과 얼굴, 중요한 약속, 조금 전에 듣거나 했던 중요한 말을 기억할 수 없다. 약속한 고객의 사무실 가는 길. 자주 왔던 길인데, 전혀 낯선 길을 걷고 있다.

"여기 어디야?"

주머니를 뒤져 전화번호를 찾는다. 주머니에서는 기억을 대신해 줄 온갖 메모들이 쏟아진다. 길바닥에 날리는 메모지, 흩어지는 기억…. 불안과 절망이 엄습한다.

이제 사에키는 더 이상 회사 일을 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르고 아내와 아이의 얼굴까지 잊어간다. 알츠하이머에는 기억상실뿐만 아니라 질투와 의심, 분노가 동반된다. 폭력적으로 변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으로 변해 가는 자신을 지켜보는 과정에는 온갖 사연과 생각이 끼여들기 마련이다. 빨리 죽기라도 하면 차라리 났겠다. 그러나 5년 혹은 10년을 살아야 한다. 가족들은 이제 내가 아닌 나를 보살피고 바라보아야 한다. 나에게는 이미 추억도, 사랑도, 가족도 남아 있지 않다.

사람은, 특히 그가 중년 이상이라면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규정되고, 과거로 존재한다. 기억을 잃는 다는 것은 과거의 관계를 잃는 것이다. 다른 모든 치명적인 질병과 마찬가지로 알츠하이머는 나의 미래를 파괴한다. 그러나 알츠하이머는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를, 관계를, 사랑을 모조리 파괴하려고 든다. 미래 없는 내가 아니라, 과거 없는 나를 무슨 수로 증명할 것인가. 알츠하이머가 다른 질병보다 두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책에서 문학적 향기를 찾기는 힘들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한 중년 남자의 삶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그렸다. 병의 진행과 나를 잊어 가는 사에키의 심정이 건조하게 서술될 뿐이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는 문학적 향기와 더불어 인생에 대한 지극한 긍정과 알츠하이머에 무너지지 않을 인간을 그리고 있다.

나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 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버리지 않는 한, 알츠하이머는 내 과거를 파괴할 수 없다. 내가 존재했음을 완전하게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알츠하이머가 아니라, 나와 함께 존재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나를 버리고 잊는 순간,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자신을 거의 잃어버린 사에키는 젊은 시절 와 보았던 도예가마터를 찾는다. 거기서 도자기를 굽고, 감자를 굽고 양파를 구워 먹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물론 사에키는 오는 길에 꼼꼼하게 해두었던 메모를 따라 걷고 있다. 그의 옆에 한 여인이 나타난다. 미인이다. 여인은 가마터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여자는 사에키 옆에서 나란히 걷는다. 혼자서 걷기 쓸쓸한 길이라 생각했는데, 옆에서 걷는 여인의 존재가 든든하다.

'나는 내 이름을 말하고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나의 물음에도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다. 그리고 말한다. 에미코라고 해요.'

에미코는 사에키 자신의 아내다. 물론 사에키는 아내를 알아보지 못한다. 다만 이 여성이 아름답고 좋은 사람이라고 느낄 뿐이다.

"좋은 이름이네요."

이 대화는 그들 부부가 대학생이던 시절, 처음 만나 나누었던 대화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치밀하다.

현기증 혹은 어지럼증 비슷한 것을 느끼는 순간부터,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결국엔 모든 것을 잃어 가는 과정까지 병의 진행은 물론이고, 감정의 변화까지 치밀하게 전개된다. 단 한 페이지라도, 단 한 줄이라도 순서를 바꾸거나 표현을 바꾸면 오히려 어색할 것 같다. 작가는 한 사람의 환자를 면밀히 관찰하고, 그의 내면과 대화하며, 그의 주변과 대화해 본 게 틀림없을 것이다. 이 소설이 일본에 알츠하이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근거이기도 하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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