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보다 실력이 최고"…대구 경명여고 '교사 선택제'

입력 2006-12-20 10:57:19

대구 경명여고 2학년 고슬기 양은 예비 수험생이 되는 이번 겨울방학을 생각하면 마음이 가볍다. 평소 걱정하던 수리와 과학탐구 영역을 학교 보충수업만으로 정리할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슬기 양의 방학 보충수업은 1~6교시까지 온통 수학과 과학 과목이다. 수학Ⅰ 초·중급반, 수학Ⅱ 공통·중급반과 함께 물리와 지구과학을 듣는다. 전처럼 국어·영어·수학·과학을 고르게 섞어 학교에서 짜 준 시간표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 만든 시간표라 가능한 일이다. 더욱 기분 좋은 건 선생님도 자신이 골랐다는 사실. 4주 동안 듣는 120시간의 수업 모두가 원하는 과목을 원하는 선생님께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의욕이 생긴다.

이번 겨울방학에 보충수업을 받는 경명여고 1, 2학년생 754명 가운데 80% 이상이 슬기 양과 같은 마음이라고 학교 조사에서 대답했다. 슬기 양처럼 자신의 필요에 맞춰 두세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학생이 대부분이고, 같은 과목을 같은 교사에게 두 번 되풀이해 들어 완전학습을 모색하는 학생도 상당수다. 이는 학교가 대구에서 처음으로 겨울방학 방과후학교를 완전히 학생선택형으로 운영하기로 한 덕분이다.

규모가 큰 대도시 고교에서 학생들에게 수업 선택권을 준다는 건 모험이다. 시·군 단위 고교의 경우 교사가 많지 않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좁지만 대도시 고교는 같은 과목 내에서도 선택받는 교사와 외면당하는 교사가 확연히 드러난다. 학생들은 더없이 만족스럽겠지만 교사들로선 선택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 다른 교사와의 비교에 따른 위화감 등을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힘든 방법이다.

교사평가제 시범학교도 아닌 경명여고가 이처럼 실질적인 교사평가제를 앞장서 도입한 이유는 뭘까. 성도용 교장은 "교육 수요자인 학생, 학부모의 만족도를 높이고 교사들에게 분발할 계기를 줌으로써 학교를 명실상부한 교육의 중심으로 되돌리기 위한 자구책"이라고 말했다. 지역 특성상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많은데다 사교육 여건이 그리 좋지 않은 점도 배경이 됐다.

학교는 여름방학 때부터 준비를 시작해 교과별 회의, 교과 주임 회의를 수차례 거쳤고 학생과 교사 대상 연수에 모의 수강 신청까지 실시했다. 지난달 20일에는 학교 홈페이지에 개설 강좌와 강의 소개, 교육계획서를 실었다. 강좌 개설 교사를 실명으로 표기한 것도 전국적으로 사례를 찾기 힘든 과감한 시도.

홈페이지를 통해 1학년 수강신청을 받은 지난 9일 오후 4시.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수강신청 코너가 열리자마자 원하는 과목을 신청하려는 학생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상당수 과목은 1분도 안 돼 40명 정원이 마감됐고, 20명을 넘겨 강좌 개설을 승인받을 수 있느냐 여부는 5분 만에 판가름났다. 10일 수강신청을 한 2학년생들도 마찬가지.

이튿날인 11일 아침. 교무실에서는 하루 종일 숨소리도 크게 들리지 않았다. 수강신청 결과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선택받은 사람과 선택받지 못한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은 피할 수 없었던 것. 교사 1인당 4개 강좌까지 개설할 수 있도록 했으나 4개 강좌 모두 승인받은 교사가 있는가 하면 단 한 강좌도 선택받지 못한 교사도 나왔다.

심리적인 부분 외에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갈등은 예견돼 있다. 학교에서 시간표를 짠 지금까지는 예체능 과목을 제외하고는 보충수업 수당이 교사들에게 어느 정도 고루 배분됐지만 앞으로는 학생들의 선택에 달렸다. 겨울과 여름방학, 학기중 방과후수업까지 1년을 계산하면 교사에 따라 700만~800만 원까지 수입이 달라질 수도 있다. 수강신청 최종 결과는 1학년 86개 강좌 개설에 59개, 2학년 102개 강좌 개설에 65개 승인으로 각각 69%와 64%에 그쳤다. 10개 강좌당 3개 이상이 학생들에게 외면받은 셈이다.

더욱 놀라운 건 학생들의 선택이 지극히 냉정했다는 사실이다. 평소에는 젊고, 외모가 좋고, 유머 감각이 있는 교사들을 좋아하던 학생들이 막상 수업을 선택할 때는 이보다는 다소 재미가 없고 엄해도 교재 연구를 충실히 하고, 교수법이 뛰어난 실력파 교사에게 더 많이 몰렸다는 것. 교사들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학생선택형 방과후학교 실무를 진행한 박찬규 경명여고 교무부장은 "변화는 벌써 시작됐다."고 말했다. 실시가 결정된 직후부터 교사들이 수업에 신경을 조금씩 더 쓰더니 지난달 교육계획서를 홈페이지에 올릴 때는 모두가 신규 교사로 돌아간 분위기였다는 것.

그는 앞으로 교사들의 교수 능력이 큰 폭으로 향상될 것으로 기대한다면서 경산 무학고 사례를 소개했다. 2003년부터 학생선택형 보충 및 특기적성수업을 계속해오고 있는 무학고의 경우 교재를 직접 제작해 수업하는 교사가 절반에 이를 정도로 철저한 교재 연구 및 수업 준비가 일반화했다. 전년도에 선택이 적었던 교사가 방학 동안 연구를 철저히 해 인기 교사로 뜨는 사례도 심심찮게 나온다. 교사들 사이의 갈등은 교과협의회를 통해 역할을 분담하고 보완함으로써 조정하고 있다.

박 부장은 "부작용에 비해 긍정적인 효과가 워낙 크기 때문에 내년 3월에는 1년 동안 개설할 방과후학교 과목과 교사를 공고해 학생들이 연간 공부 계획을 원하는 대로 짤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