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아스팔트를 뚫고 고개를 내민 들꽃에서 우리는 '희망'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이 더욱 찬란해지는 것처럼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희망의 꽃은 어김없이 피어나기 마련. 세상살이가 더욱 힘들어졌다는 목소리가 유난히 높았던 2006년. 절망을 딛고 희망이란 작은 물줄기를 길어올린 사람들의 삶은 실의에 빠진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과 메시지를 던져준다. 2006년을 '나의 해'로 만든 두 사람을 만났다.
# 헌옷 수거업으로 자활 성공한 정외수씨
4급 지체장애인 정외수(43·대구시 달서구 월성동.사진 왼쪽) 씨. IMF 이후 잿빛으로 얼룩졌던 그의 삶은 2006년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동안 정부의 도움을 받는 기초생활수급권자였던 그는 지난달 여기에서 벗어나 자활에 성공했다. 자녀가 직장을 갖는 등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자활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을 감안하면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선 정 씨의 사례는 매우 드물다는 게 구청의 얘기다.
부산의 조그마한 공장에서 용접일을 하던 정 씨의 인생에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지난 1997년. 용접을 하다 사고로 다리를 다쳐 지체장애인이 됐다. 처음엔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일을 계속했지만 IMF로 결국 직장을 잃고 고향과 가까운 대구로 옮겨왔다. "그때 주머니엔 100원도 없었지요. 겨우겨우 월세방을 구했습니다." 장애에다 삶의 희망마저 잃어버린 그는 괴로움을 잊기 위해 집안에 틀어박혀 술에 빠져 지냈다.
삶에 대한 의지마저 없어진 정 씨의 인생에 한 줄기 빛을 던져준 이는 부인(46)이었다. "몸을 다쳐 일을 하는 가운데 아내를 만났지요. '당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아내의 격려가 무엇보다 큰 힘이 됐습니다. 가족을 책임져야겠다는 마음도 갖게 됐고요."
6년 전에 주변의 권유로 시작한 일은 헌 옷 수거업. 대구와 경북의 아파트, 주택 등에서 내놓은 헌 옷을 모아 캄보디아 등지로 수출하는 업체에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처음엔 1주일에 1t을 모았으나 지금은 4t으로 느는 등 갈수록 손에 일이 붙었다. 옷은 그냥 수거하는 것이 아니라 기금 형식으로 아파트에 대금을 지불하고 있다.
"처음 일할 때엔 수거함조차 구하지 못해 애를 태웠어요. 불편한 몸으로 트럭을 몰고 곳곳을 찾아다니는 일도 고역이었습니다." 일을 하면서 목발을 잡고 일어섰고, 지금은 불편하지만 두 발로 걸어다닐 정도로 건강도 좋아졌다.
자활에 성공한 정 씨는 최근 주변 장애인들에게 용기를 주는 일에도 동참하고 있다. 지체장애인들로 결성된 '한걸음' 산악동우회 등반대장을 맡아 도시락 제공 등 물적 지원과 함께 같이 등산을 하면서 자활 의지를 불어넣는 데 애쓰고 있는 것. 헌 옷 수거업을 계속하면서 어려운 이들을 돕고 싶다는 게 그의 포부다.
"몸이 불편하다고 절대 포기하거나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이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 9년만에 공무원의 꿈 이룬 노순영씨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처음에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어요. 앞으로 대구의 문화산업 발전에 이바지하는 게 큰 꿈입니다."
대구시 서구 평리4동사무소에서 각종 증명 발급과 전입신고 업무를 맡고 있는 노순영(32·여·대구시 서구 평리3동) 씨. 그에게 2006년은 말 그대로 '꿈이 이뤄진 한 해'다. 1997년 대학을 졸업한 지 9년여 만에 원하던 공무원이 됐기 때문이다.
노 씨가 대학을 졸업하던 당시는 IMF 외환위기 무렵.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이 될 줄로 기대했지만 취업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대로 원서를 냈지만 영업직을 제외하고는 직장을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고민 끝에 공무원 시험 준비를 석 달 정도 했지만 공무원이 되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과외 교사 등 아르바이트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1999년 노 씨는 국비로 6개월간의 컴퓨터 교육을 받은 후 2000년 2월부터 학원 컴퓨터 강사를 시작했다. 4년 동안 이 일을 해 가장 오래(?) 종사한 직업이 됐다. 하지만 장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때문에 다시 공무원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금방 공무원이 될 줄 알았는데 쉽지 않았어요." 1년 뒤인 2005년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엔 충격이 컸다. 다시 뼈를 깎는 노력 끝에 9급 공무원 시험 세 번째 도전 끝에 합격의 영광을 차지했다. 경쟁률은 70대 1이 넘었다.
노 씨는 "나이가 많아 면접을 보면서 마음을 졸였는데 합격해 기분이 좋았다."며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 것이 공무원이 된 후 가장 큰 변화"라고 털어놨다. 임용 후에는 영어도 배우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막상 공무원으로 일해보니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업무량이 많아요. 열심히 일을 배워 실력을 갖춘 공무원이 되는 게 목표입니다."
취업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후배'들에게 노 씨는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조급함보단 느긋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해요. 그리고 열심히 매달리다 보면 꿈은 꼭 이뤄집니다. 모든 분들이 파이팅하기를 바랍니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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