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에서)문화사랑방을 위하여

입력 2006-12-09 07:08:14

어린 날 우리집은 사랑방이었다. 회갑을 넘기신 아버지는 사람을 좋아해 집안은 늘 노인들로 북적거렸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인 어린 나는 이미 사랑방에서 어깨 너머로 민화투를 배웠고, 오랜 인생을 살아온 노인네들의 한많은 생의 비밀을 다 훔쳐 보았다. 나는 담배연기 매케한 사랑방에서 이미 애늙은이였다.

내가 자란 곳은 경주와 영천의 중간 지점인 아화리로 면소재지이다. 이곳에서 밀양 박씨 집성촌인 오봉산 아래 천촌리까지 가려면 십리는 족히 걸린다. 그러자니 자연 우리집은 친척들의 경유지였다. 아버지 못지 않게 어머니는 손이 컸다. 집에 누구라도 오면 물 한 사발이라도 대접해서 보내야 당신 마음이 편했다. 나는 이런 고향집 분위기 속에서 유년을 그렇게 보냈다.

나는 마흔에 오랜 직장 생활을 접었다. 주위 사람들이 나를 평할 때 주변머리 없고, 황소 고집이고, 남의 눈치보지 않기로 소문 나 있다고 한다. 이런 반골이 직장 생활을 작파하고 출판사를 연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말리는 눈치였다. 늘푼수 없는 글쟁이가 사업이란 걸 시작했으니 말이다.

시오리는 시인들 모임이다. 시오리 사람들은 매달 모일 때마다 천원씩 갹출하여 퇴직수당을 주기 위해서란다. 시오리 모임에는 천원이 상징적이다. 돈이 적고 많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 달이 지나자 이 퇴직 수당마져 끊겼다. 세 달이 지나도 굶어죽지 않고 버텼으니 괜찮을 거란다.

나는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는 신념으로 내일에 대해서 별반 걱정하지 않는다. 천성 탓만이 아니라 나름대로 욕심을 줄여 살기 때문이다. 그냥 오늘 묵묵히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 할 뿐이다.

만인(萬人)이란 상호를 내걸면서 나는 속으로 다짐하였다. 진정으로 좋은 책을 만들어 만명의 독자들이 읽어준다면 성공한 것이라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다. 나는 어쩜 국수주의자인지 모른다. 한 곳에 오래 뿌리내리고 살고자하는 토박이 정신이 강하다. 그런 의미에서 만인사는 영남의 정신을 오롯이 담는 그릇이 되고 싶다.

만인사 간판을 내건지 십여년, 한 달 전에 향교 옆에 아담한 사옥(社屋) 한 채를 마련하였다. 모 패션디자이너가 여름내내 리모델링한 집으로 전면이 고동색 나무로 인테리어된 곳이다. 외견상 그럴듯 하다. 집 짓는 사람 따로 있고, 들어가 사는 사람 따로 있다고 했던가. 공교롭게도 오늘 이전하고 소위 집들이를 한다.

나는 이층에 온돌방 한 칸을 마련하고 한지로 도배를 하여 문화사랑방을 만들었다. 어린 날 고향집에 동네 노인네들이 북적거렸던 사랑방 흉내를 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나치는 길이 있으시면 사랑방에 와서 따뜻한 국화차라도 한 잔하고 가시기를…….

박진형(시인, 만인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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