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 나의 삶, 김수학] ⑦이팝나무

입력 2006-12-04 07:02:44

나는 1997년 새마을 운동 중앙협의회 회장으로 재임하고 있다가 국민의 정부 출범 후 98년 7월 사임하고 경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나의 귀향길 발걸음은 가볍지만은 않았다. 20대 초반부터 공직에 몸담아 오면서 줄곧 대구·서울 등 도시에서 생활해 왔으나 내가 농민의 자식이고 또 고향을 망각한 적은 없다고 자부해 왔는데 막상 현실로 부딪치고 보니 진정 그랬을까? 티끌만큼 假飾(가식)이나 僞善(위선)적 행위는 없었는가 하는 自愧心(자괴심)이 뇌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自過不知(자과부지)라, 다시 스스로 반성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家業(가업)인 농사일을 도우는 한편, 틈나는 대로 그간 멀리 떨어져 서로 통하지 못한 친구들을 만나 회포도 나누었다. 특히 1970년대 옛 보릿고개의 恨(한)을 달래며, 풍요의 희망을 안겨준 새마을운동의 현장을 찾아보면서 새마을지도자와 참여 인사들의 당시 경험담을 되새기기도 했다.

한번은 새마을운동 중앙협의회 경상남도지부 사무국장을 거쳐 새마을운동 중앙연수원 교수를 역임하다 낙향한 친구 이영섭을 찾았다. 그가 사는 곳은 경남 사천시 정동면 화암리에 위치한 전통적 농촌이었다. 그는 새마을운동에 몸담았던 爲人(위인)답게 초지일관 가업인 농사에 전념하면서 고장을 위하여 정성껏 봉사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특히 낙후된 농촌의 정보화를 돕기 위해 이웃주민에게 컴퓨터 교육을 실시하고 있어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가 몸소 운전하는 자동차편으로 그 지역의 知己(지기)도 찾아보았다. 마침 24절기의 하나인 芒種(망종)을 대엿새 앞두고 있어 "보리는 망종 전에 베어라"는 속담이 떠올랐다.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못 먹는다"던 바닷가 어느 동네 처녀들의 서러운 보릿고개 얘기가 떠올라 그에게 물었다. 이곳에도 그런 등속의 말들이 남아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그 시절 여성들의 시름을 담은 사연 하나를 소개했다. 못 둑에서 자라는 두 그루의 고목을 가리키며 그는 "이팝나무 꽃 필 적엔 딸네 집에도 가지 마라"하는 그 고장 전래의 鄕語(향어) 한 구절을 설명했다. '보리누름(보리가 누렇게 익는 철)'에 즈음해 흰 꽃이 피는 것을 보릿고개의 신호로 諷刺(풍자)하여 읊은 것이라 덧붙여 말하면서 그 나무의 나이가 150여년이 된다 했다. 100여 년 전 50년생 成木(성목)을 그곳에 심었다는 것이다.

화암리를 뒤로 하고 가는 길을 재촉했지만, 미련이 남았음인지 자꾸 되돌아보았다. 이팝나무에 새겨진 지난 세월의 상처, 옛 일들에 대한 회한과 아쉬움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마을들은 초록빛으로 뒤덮인 들녘풍경과 어우러져 몹시도 아늑해 보인다.

마을 어귀 大地(대지)에 굳건히 뿌리 내려 150 여 년 보릿고개 애환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證木(증목) 이팝나무…….

옛것이 점차 사라져가는 터라 노파심에서 부디 저 나무가 마을의 수호신과도 같은 존재로 무럭무럭 잘 자라 주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나는 그 날 고성, 진주 등 두 곳 새마을 지도자들을 순방하고 귀향했다. 그 여행에서 새마을 동지들의 의리와 고장 사랑의 정성에 새삼 깊은 감명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오죽 먹을 것이 없었으면 딸네 집조차 가지 말라고 했을까……. 시집 간 딸에 대한 부모의 애틋한 사랑과 우리 민족의 타고 난 情(정)이 느껴졌다.

전 경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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