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초등학교 동기인 K군과 함께 시오리 떨어진 산기슭에 있는 나의 과수원을 찾았다. 그곳은 나의 선친과 聘父(빙부)의 땀이 맺혀 있는, 흙의 의미를 일깨워준 소중한 추억의 땅이다.
고개등의 허리쯤 되는 곳에 다다르니 관리인 부부가 아침을 먹으려 하산하고 있었다. 한낮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새벽 이른 시간에 일하고 아침 먹으러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기운이 다 빠진 채 땀을 줄줄 흘리는 그들을 무엇으로 위로해야 할지 가슴이 저려왔다.
"안 덥는교?"
"괜찮습니다."
"힘들지요?"
"이게 우리 한 평생 아닙니꺼?"
한 평생이라... 사람의 生(생)은 과연 무엇일까? 답답한 마음에 그 산꼭대기 碧桃山(벽도산)으로 올라갔다. 신라의 옛 서울 경주 시가지를 중심으로 하는 커다란 분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동쪽으론 明活山(명활산), 서쪽에는 仙桃山(선도산), 남쪽에는 南山(남산), 북쪽으로는 小金剛(소금강)의 여러 산들이 둘러 있고 그 중앙을 兄山江(형산강)이 남에서 북으로 관통하여 동해의 迎日灣(영일만)으로 흐르고, 기름진 벌판이 열린 채 자리하여 옛 大都城(대도성)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더구나 당시의 융성했던 자취를 방불케 하는 옛 탑과 陵(능) 등이 원근에 흩어져 있어 옛 서울의 영상이 가슴에 스미어 든다.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이 앞서 말한, 아담하고 부드럽고 포근한 벽도산이다.
어린 시절, 멀리서 보았던 남산은 바위와 붉은 흙빛, 울퉁불퉁한 산맥으로 비추어지곤 했다. 진달래가 지고 나면, 남산엔 철쭉이 지천으로 핀다. 과거, 초등학교 소풍지는 으레 남산이었다. 그 즐겁던 소풍길, 철쭉의 진을 먹으면 숨통이 막힌다는 선생님들의 경고가 끊이지 않았으나 철쭉 사고는 비일비재했다. 선생님께서는 철쭉 따먹은 아이를 업고 마을로 내려가 쌀뜨물을 먹이셨다. 철쭉독에 직효인 쌀뜨물은 초주검이 된 아이들을 신기하게 살려냈다.
온통 흙빛이던 남산은 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박정희 대통령의 남산 복원계획에 의하여 이제 푸르게 탈바꿈됐다.
시골의 밤은 어둡고 적막했다. 늑대 소리에 놀라고 멀리 반딧불이 보이면 도깨비불이 아닌가 싶어 몸서리가 쳐졌다. 우스운 일도 있었다. 옆집의 영감이 이른 저녁을 먹고 자기 논에서 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 12시쯤 갑자기 남산쪽에서 불이 번쩍번쩍하는 것이었다. 어두운 들판길, 손전등을 흔들며 걷는 사람의 전등 불빛을 호랑이 불빛으로 알고 두려운 나머지 둑에 엎드려 숨었다. 그런데 그 호랑이불이 자꾸만 길을 따라 자신이 숨어있는 둑 쪽으로 다가와 혼비백산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열한 살 때부터 열세 살 되던 해 까지 3년간은 극심한 가뭄이었다. 가뭄이 오면 남산골 상류에서 흐르는 관개용수를 나눠받기 위해 밤을 새운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오늘은 김 서방네, 내일은 이 서방네 식으로 물을 나누어 썼으나 가끔은 물을 도둑맞는 일도 있었다. 윗 논의 주인이 몰래 고랑을 파 관개용수의 물을 자기 논에 대는 날엔, 아래쪽 논임자는 물을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 나누기 작업 차례가 돌아오면 밤을 새워 물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
김수학 전 경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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